설치미술가 바버라 크루거는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라는 1987년 카피 문구로 20세기 말 인간과 사회상을 조명했다. 철학의 테제를 갖다 쓸 만큼 우리는 어느새 소비가 지닌 가치의 무게감을, 소비 행위의 보편성을 절감하고 있었던 셈이다.
현대인은 21세기를 관통하며 진정한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로 변모하고 있다. 하지만 소비는 지금까지 욕망과 쾌락만을 위한 천박한 물질주의의 산물로 폄하됐고, 나아가 사치나 방탕과 연결하는 사회적 통념으로 인식된 게 사실이다.
무엇보다 생산이 중요했던 근대사회에서 소비는 상대적인 박탈감 속에 열등적 함의에 갇혀있었다. 앞으로 인공지능 시대에 기계가 생산과 노동을 무섭게 점령해 갈 때, 인간에게 남은 가장 중요한 활동은 소비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책은 역사가가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익숙한 물건과 공간, 그리고 소비라는 인간의 행위와 동기를 통해 인간 역사를 내밀하고 다층적으로 고찰한다.
근대 초기 유럽의 소비는 유언장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임종을 앞두고 이렇게 유언장을 남겼다. “두 번째로 좋은 침대를 아내 앤 해서웨이에게 준다.”
이 남자답지(?) 않은 ‘치졸한’ 문구는 셰익스피어 진위 논쟁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인데, 이 내용으로 알 수 있는 건 죽은 사람이 남긴 물건에 부여한 ‘소비의 가치’다. “내가 두 번째라면 첫 번째 침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남은 자는 ‘하락한’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의구심을 죽을 때까지 벗지 못했을 것이다.
1824년 포목상인 피에르 파리소가 한곳에 옷을 만들고 파는 혁신적인 시스템으로 상점을 열고 기성복을 팔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양복을 맞춰 입어야 했던 계층이나 중고의류에 만족했던 계층 모두 이 기성복에 열광했다. 특히 기성복으로 새 옷을 구매하게 된 사람들은 소비의 진정한 행복감을 맛봤다. 소상인들, 노동자들, 보조원들 모두 ‘대량으로 복제된 명품’의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식민주의의 강화는 ‘신화적 소비’의 마케팅이 필요한 법일까. 19세기 말, 서구에서 생산된 다양한 비누가 남부 아프리카에 들어오자, 백인처럼 되고 싶은 흑인들이 하얀 비누로 매일 아침 씻곤 했다. 위생과 미용업계의 백색 신화가 여전히 돌풍을 일으키는 배경이다.
여성을 겨냥한 소비의 원조는 화장품 업체 에이본이다. 19세기 말부터 시작해 1967년까지 계속된 최고 성공작인 에이본의 TV 광고는 여성 판매원이 문을 두드리며 “에이본이 방문합니다”를 외치는 장면이다. 화장품 소비의 기억이 여성일 수밖에 없는 근거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비를 윤리적 차원에서 거론한 최초의 사례는 설탕에서 찾을 수 있다. 영국은 의사도 권고할 만큼 설탕 중독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윌리엄 폭스는 설탕 소비를 경제적 측면이 아닌 윤리적 차원에서 고려해야 한다며 “노예가 생산하는 설탕을 섭취하는 일은 인간을 잡아먹는 식인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설탕 거부운동을 펼쳤다.
소비를 바라보는 시각은 학자마다 달랐다. 카를 마르크스는 ‘동물적 기능’으로, 막스 베버는 ‘쾌락’으로 간주했다. 소스타인 베블런은 ‘과시적 낭비’라는 개념을 통해 명성의 원인임을 주장했고, 베르너 좀바르트는 ‘사치와 자본주의’에서 궁정의 생활에서 나타난 변화를 통해 사치가 지배계급의 생활양식을 재편성해 근대적 경제조직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봤다.
소비사회가 극렬하게 진행된 1920년대 미국인들은 소비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균등’으로 여기며 민주주의와 동일하게 평가했다. 한 경제학자는 사회적 진보를 “사치품이 편의품으로, 편의품이 필수품으로 전환되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풍요로운 소비 사회가 개인의 선택과 자유를 증진한다고 보는 학자가 있는 반면, 천박한 소비 개인주의가 공적인 삶과 사회적 의무를 훼손한다고 우려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
소비가 광범위하게 이뤄지는 현실에서 그 요소의 경계선을 확정하기는 쉽지 않다. 판매나 광고는 생산과 소비 영역에 걸쳐있는 이중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 소비를 민간 영역으로만 인식하는 정체성도 흔들리고 있다. 정부가 큰돈을 쓰면서 소비자처럼 행동해 시장에 영향을 미치거나 소비를 규제하는 역할로 더 큰 권력을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소비는 글로벌 자본주의에 대항할 단초를 찾아내거나 국가나 민족, 계급을 초월하는 또 다른 형태의 연대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가장 현실 참여적이고 앞서가는 주제”라며 “어떤 의미에선 구조에 함몰됐던 인간을 다시 역사의 중심에 세우는 작업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소비의 역사=설혜심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496쪽/2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