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ㅇ을 잘 하면 국민이 그 열매를 따먹지만 본인에게는 허업’이라고 했던 이가 있었다. 지난달 세상을 떠난 전 국무총리 김종필(JP)이 바로 그 사람으로 그가 허업이라고 했던 것은 정치였다.
JP와 관련해 그로 인해 ‘열매를 따 먹었는지’ 확신이 안 서지만 국민들은 사실상 거의 잊고 있는 JP만의 다른 면모가 있다. 1970 ~ 80년대 초중고교를 다닌 이들은 신라의 해상왕 장보고, 고구려의 권력자 연개소문, 고려시대 입술에 피를 흘리는 최영 장군,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일으켰던 서산대사 등의 수염 가득한 얼굴을 안다. 교실 뒤편이나 학교 복도에 큼지막하게 걸려있었던 그림(또는 사진) 때문이다.
당시는 몰랐지만 그 그림들은 민족기록화라는 연작이었다. 1967년부터 1979년 사이 당대의 유명 화가들이 그린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등을 주제로 한 대형 회화 작품이었는데 그것을 주도한 이가 바로 JP였다.
서산대사와 장보고 등의 그림을 그린 박광진 화백(예술원 회원, 서울교대 교수)은 ‘김종필 회고록’(와이즈베리 펴냄)의 한 대목에서 이렇게 밝혔다. “JP가 일본에 사람을 보내 3톤 트럭 분량의 미술재료를 배로 싣고 와 화단에 무료로 풀어놨다. 당시 우리 화가들로서는 평생 처음 보는 엄청난 것들이었다”고. ‘민족사적 사건을 회화로 형상화해 민족정체성을 확인하고 국민들에게 역사의식을 심기 위해 시작했다’는 설명이 조금은 고리타분하지만 어쨌든 그래서 그 당시 학생들은 위인전 속 인물들이 멀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민족기록화 중에 ‘협업영농, 종합우수, 환경정리’ 등의 새마을 연작시리즈가 있고 유달리 민족과 애국이 강조된 것에 대해 조금은 불편해지기도 하지만 JP 또는 민족기록화의 그 흔적마저 찾기 쉽지 않은 것과는 또 다른 얘기다.
올해로 개관 40년을 맞는 세종문화회관도 JP와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 1978년 준공 당시 동양 최대의 파이프오르간이 들어선 것도 그의 지시가 출발점이었다. JP의 육성 회고다. “국무총리였던 나는 건축도중 설계변경을 지시해 파이프오르간을 설치케 했다. 그때 돈으로 피아노 1700대 값과 맞먹는 6억1300만원을 들여 동양 최대 규모의 파이프오르간을 장착했다. 1978년 5월 방한 당시 영국의 히스 전 총리는 (세종문화회관에 들러) 윗도리를 벗어던지고는 멘델스존의 ‘소나타 2번 작품 65’ 등을 45분 동안이나 연주했다.”고.
하지만 40주년 세종문화회관과 관련해 여러 말의 상찬에서 JP와 관련한 언급은 찾기 어려웠다. 물론 덕수궁 안의 세종대왕 동상과 세종문화회관 못지 않은 광화문의 명물 ‘이순신 동상’도 JP가 1968년 애국선열조상(彫像)건립위원회 총재를 맡아 주도한 것이라는 건 퀴퀴한 정부기록물이나 일부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JP가 민족기록화의 영감을 떠올리게 된 계기는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성의 그림이었다고 한다. 나폴레옹 프랑스의 숨통을 끊어놓은 것으로 평가받는 워털루 전투에 참전한 영국 군인(찰스 유이트 상사)가 프랑스군의 나폴레옹 황제기를 빼앗는 장면이 담긴 그림이었는데 ‘손대지 말라’는 경고에도 방문객들의 손길로 상사의 종아리는 까맣게 돼 있었다는 기억과 함께.
JP에 대한 훈장 수훈 여부나 정치적인 평가는 역사가나 후대의 몫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계몽일지, 민족진흥일지 의도야 어쨌든' 애호가이자 문화행정가로서 그의 흔적을 정치적인 입지나 지형 때문에 애써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또다른 얘기다. 진영과 관계없이 영화계에서 존경받는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때 문화예술 시책들은 대부분이 직접적으로 JP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원정에 나서 알프스산을 오를 때 나폴레옹은 험한 산길에서 사실 노새를 탔다고 한다. 하지만 왕정화가 다비드는 백마를 탄 명장 나폴레옹으로 그려내 후세에 명화로 기억시켰다. 왕족 등 보수파에서는 일대의 혼란으로 기억하지만 프랑스 혁명도 들라크르와의 ‘자유의 여신이 민중을 이끌다’라는 한 장의 그림을 통해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혁명으로 형상화된다.
다시 민족기록화를 회고하는 박광진 교수의 말이다. “그때 그 작품들이 모두 국가적인 기록물인데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어 아쉽습니다.” 그림들은 일부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일부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있다고만 알려진다. 지금도 간간히 열리는 민족기록화 순회전시 때 JP에게 팸플릿이나 안내문 한뼘의 공간을 열어주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