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십년간을 뒤져 봐도 교황청과 다른 국가의 갈등이 이렇게 심각해진 적이 없습니다."
11일 한 천주교계 고위 관계자는 최근 교황청과 트럼프 행정부의 갈등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레오 14세 교황이 이란과의 전쟁을 멈춰줄 것을 촉구하자 교황 측근을 불러 공개 경고까지 내놨다는 주장이 나오는 등 미국 정부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있다. 이 관계자는 "(미국 정부가) 교황청에 최소한의 존중조차 보여주지 않는 듯하다"며 "전세계의 천주교인이 연대 규탄에 나설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천주교의 상징인 교황청은 전쟁이나 대량 학살, 국가 간 분쟁 등 반인도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항상 반대 메시지를 던진다.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러-우 전쟁 발발 직후 "무의미한 학살"이라며 휴전을 촉구했고 가자 지구의 분쟁 종식을 호소했다. 요한 바오로 2세도 중동 지역의 분쟁 중단과 평화가 오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수차례 냈다.
미국 정부는 마뜩잖은 분위기다. 엘브리지 콜비 미 국방부 정책차관은 크리스토프 피에르 추기경과의 비공개 회의에서 "가톨릭 교회는 미국 편에 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외신들은 이 자리에서 '아비뇽 유수'까지 언급됐다고 전했다. 아비뇽 유수는 14세기 교황이 갈등을 빚던 프랑스의 장군에게 뺨을 맞고 수모를 겪은 뒤 유폐당한 사건이다. 사실이라면 교황청에 심각한 모욕을 가한 셈이다.
천주교계는 미국 정부의 태도가 국가 간 예의에 어긋날 뿐 아니라 14억 천주교인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교황청은 바티칸을 중심으로 180개국 이상과 외교관계를 맺은 국가로, 그 수장인 교황의 메시지는 단순한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천주교계 전체를 대변한다. 교황의 방문 시 각 국가가 다른 국가 정상보다 높은 예우를 하는 것도 세계 최대 종교 대표자로서의 권위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포브스가 발표한 전세계 권력자 랭킹에 따르면 교황은 모든 인사 중 6위에 올랐다. 빌 게이츠나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보다 높으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위다.
미국 천주교계와의 해묵은 갈등이 영향을 줬다는 시각도 있다. 미국 천주교는 단일 교파로서는 가장 영향력이 강하지만 굉장히 보수적이며 친트럼프 세력의 힘이 세다.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부터 레오14세 교황까지 중도-진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현 교황청과는 껄끄러운 관계다. 2023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례적으로 미 텍사스 오스틴 교구의 스트릭랜드 주교를 직접 해임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천주교계는 이같은 갈등이 봉합되지 못하면 가톨릭 국가 중심의 비판 성명, 공식 항의 등 외교적 조치가 있을 수도 있다고 내다본다. 이탈리아나 프랑스, 스페인, 브라질 등 EU(유럽연합)외에도 브라질, 멕시코 등 수십여개국 이상의 국가가 동참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와 필리핀 등 아시아 국가를 포함하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난다.
아직 유의미한 움직임은 관측되지 않지만 국내 천주교계도 최근의 갈등을 주시하고 있다. 일부 종교 단체는 규탄 집회, 반전 행사 등 조치도 논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한 종교계 관계자는 "인류의 영적 지도자로서의 교황의 입지는 각국의 존중으로 세워진 것"이라며 "국력을 앞세워 마음에 들지 않는 메시지를 금지하려 한다면 반발을 피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