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발전소에서 연소하고 남은 폐연료봉을 뜻하는 사용후핵연료의 처분 문제는 원전을 단 1기라도 가동하는 국가에서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원전을 가동할 때 사용후핵연료가 필수적으로 발생하는데 이 사용후핵연료를 계속해서 임시저장시설에 보관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원전 가동국 가운데 사용후핵연료 처분 정책을 마련하지 않은 국가를 ‘화장실 없는 아파트’로 비유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17일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수력원자력, 한국원자력환경공단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말 기준 전 세계 원전 가동국은 한국을 포함해 31개국이다. 이들은 국가별 기술 수준과 국민 수용성, 정치적 이해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사용후핵연료 관리 정책을 결정한다.
31개국 가운데 미국과 프랑스, 스웨덴, 영국, 캐나다 등 22개국은 현재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시설을 운영 중이다. 중간저장은 사용후핵연료를 원전에서 꺼내 직접처분이나 재처리(재활용)하기 전에 한 곳에 모아 짧게는 30년, 길게는 80년간 안전하게 관리하는 중간 단계를 의미한다. 사실상 사용후핵연료 처분 과정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사용후핵연료 처분 정책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중간저장시설을 운영하는 22개국의 사용후핵연료 처분 정책은 크게 3가지 형태로 나뉜다. 먼저 △독일 △루마니아 △미국 △스웨덴 △스페인 △슬로바키아 △캐나다 △핀란드 8개국은 최종처분까지 결정했다. 최종처분은 인체에 노출될 경우 즉사할 정도로 독성을 지닌 방사선을 배출하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인 사용후핵연료를 인간의 생활권으로부터 영구히 격리시키는 것이다. 달리 영구처분으로도 불린다.
최종처분은 구체적으로 △해양처분 △빙하처분 △우주처분 △심지층처분 △초장심도처분 등 5개 방법으로 구분된다. 해양처분은 사용후핵연료를 전용용기에 담아 바다에 버리는 방식인데 1975년 ‘폐기물 및 기타물질의 투기에 의한 해양오염방지에 관한 협약’(런던협약) 발효로 금지됐다. 그린란드와 남극대륙 등의 안정된 빙하에 사용후핵연료를 묻는 빙하처분 방식도 1961년 남극조약으로 금지되고 있다.
우주처분은 사용후핵연료를 우주선에 실어 우주공간으로 방출하는 방식이나 1986년 미국 챌린저호 발사 실패 이후 높은 비용과 발사실패 위험성 때문에 연구가 중단됐다. 초장심도처분은 지하 3000~5000m 깊이 암반층에 사용후핵연료를 처분하는 방식인데 기술적 애로사항으로 아직 연구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이 때문에 최종처분을 결정한 국가는 모두 심지층처분 방식을 선택했다. 장기간 부식과 압력에 있는 전용 처분용기에 사용후핵연료를 넣어 지하 300~1000m 깊이의 심지층에 매립해 보관하는 방식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경제성과 안전성 등 종합적인 관점에서 심지층처분이 가장 적절하다고 권고하고 있다.
또 △러시아 △영국 △인도 △일본 △중국 △프랑스 6개 나라는 재처리 방식을 하고 있다. 재처리는 사용후핵연료에서 물리·화학적 방법으로 우라늄을 분리·회수해 연료로 재활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재처리의 경우 우라늄을 분리·회수하고 남은 사용후핵연료 처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최종처분 역시 필요하다. 이 중 러시아와 영국, 일본, 프랑스 등은 최종처분으로 심지층처분 방식을 결정했다.
이 밖에 △벨기에 △불가리아 △스위스 △아르메니아 △아르헨티나 △우크라이나 △체코 △헝가리 8개국은 중간저장시설만 운영하며 다음 단계 사용후핵연료 관리 정책을 고심하고 있다.
반면 한국을 비롯해 △남아프리카공화국 △네덜란드 △대만 △멕시코 △브라질 △슬로베니아 △이란 △파키스탄 9개 국가는 정치·사회적 갈등 등을 이유로 중간저장을 비롯한 사용후핵연료 처분 로드맵을 전혀 마련하지 못한 상황이다. 원전 부지 안에 위치한 습식저장시설(수조) 등에 사용후핵연료를 임시저장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사용후핵연료 관리 정책의 경우 되돌리는 게 어렵다는 이유에서 임시저장 공간이 충분하다면 기술 발전 및 국제관리정책 변화를 지켜보며 판단을 내리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 정책 재검토준비단 단장을 맡은 은재호 한국행정연구원 대외부원장 겸 한국갈등관리학회장은 “사용후핵연료 관리 정책이 너무 뜨거운 이슈여서 역대 어느 정부도 쉽게 못 건드리는 ‘님토(not in my term of office)’ 현상이 누적돼 온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영국, 프랑스, 스웨덴이 10년간 공론화로 사회 합의를 구축하면서 이후 절차가 오히려 더 빨라졌던 것처럼 문재인정부도 공론화를 하는 게 오히려 더 빠른 결론을 내는 올바른 선택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