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에 6조 쏴주는 한은, 긴축기조에 배치 안 된다는 이유[이지경제]

세종=안재용 기자
2022.10.29 06:00
[서울=뉴시스] 정병혁 기자 =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6일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시중은행장들과의 만찬에 참석하고 있다. 2022.10.26.

한국은행이 레고랜드발(發) 자금시장 경색을 막기 위해 6조원 규모의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을 실시하면서 기준금리 인상이라는 긴축적 통화정책 기조와 상충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그러나 한은은 "현 통화정책 기조와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는 입장이다. RP 매입이 금융기관에 6조원 규모 자금을 공급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한은은 어떤 이유로 이렇게 주장하는 것일까.

28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한은은 지난 27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열고 '단기금융시장 안정화 조치'를 발표했다. 이번 조치에는 △대출 적격담보증권·차액결제이행용 담보증권·공개시장운영 RP매매 대상증권에 은행채·공공기관채 추가 △차액결제이행용 담보증권 제공비율 인상(70%→80%) 3개월 유예 △6조원 규모 RP 매입 등이 포함됐다.

한은에 따르면 대출 적격담보증권·차액결제이행용 담보증권·공개시장운영 RP매매 대상증권에 은행채·공공기관채를 포함하기로 한 것과 차액결제이행용 담보증권 제공비율 인상 유예 대책은 시장에 직접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다.

두 대책이 추가 유동성을 공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쉽다. 대상증권 확대는 한은 대출 규모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기존 대출에 대한 담보를 국채·통화안정증권(통안채)에서 은행채·공공기관채로 확대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은행은 추가로 채권(은행채)을 발행하거나 차입하지 않고 국채와 통안채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최근 은행들이 채권시장에서 은행채를 발행한 이유 중 하나가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규제에 대응하기 위해 국채·통안채 매입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은행채를 매수하기 위해 대기하던 자금이 다른 회사채 시장으로 흡수될 가능성이 있다.

차액결제이행용 담보증권 제공비율 인상 유예 또한 마찬가지다. 줄어들 유동성이 7조5000억원 가량 덜 줄어드는 효과는 있으나 시장에 유동성을 푸는 것은 아니다. 또 시행시기가 내년 2월로 현 시장에 당장 영향은 크지 않다.

반면 RP 매입은 한은이 직접적으로 6조원 규모의 유동성을 증권사와 증권금융 등에 공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한은은 통화정책 기조와 배치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우선 통화정책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살펴봐야 한다. 한은은 기준금리를 통해 통화정책을 펼친다. 기준금리를 올리면 시중의 자금이 한은으로 흡수되고 기준금리를 내리면 한은이 발권력을 통해 마련한 유동성이 시장에 풀린다.

금융시장에서 기준금리는 한은이 금융기관에 7일물 RP를 매입할 때 고정입찰금리로 쓰인다. RP란 되사는 것을 약정한 채권을 말한다. 예컨대 RP 7일물은 7일 뒤에 되사는 것을 조건으로 하는 채권이라는 뜻이다. RP 7일물을 100억원 어치 한은에 매각했다면 7일 뒤에는 해당 채권을 다시 사들여야 한다. 한은의 정책 기조와 시장 상황에 따라 기간 연장은 가능하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했다'는 말은 '한은이 은행에서 RP를 사들일 때 0.25%포인트만큼 싼 가격으로 매입한다'는 말이다. 채권 가격은 채권 금리와 반대로 움직이므로 금리가 올라가면 가격이 하락한다.

[서울=뉴시스] 김진아 기자 =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3일 오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비상 거시경제 금융회의 브리핑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마스크를 벗고 있다. 왼쪽부터 최상목 대통령실 경제수석비서관, 이 총재,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2022.10.23.

금융시장이 정상적으로 움직일 때, 한은이 시중은행과 RP 거래에서 지급하는 돈이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시중은행의 조달금리가 올라가고 개인 또는 기업의 대출금리가 상승한다. 금리인상 또는 인하의 영향은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만기가 7일로 짧은 초단기 채권에서 3개월물, 1년물, 3년물, 5년물, 10년물 등으로 파급된다.

또 기준금리는 은행이 지급준비금을 맞추고 돈이 남을 때 이를 한은에 예금하는 자금조정예금의 준거가 된다. 은행이 한은에 돈을 맡길 때는 '기준금리-1%포인트'가, 반대로 은행이 자금조정 대출을 한은에서 받을 때는 '기준금리+1%포인트'가 적용된다. 다만 은행들의 건전성이 양호하고 금융시장이 극단적 위기국면에 처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자금조정예금(대출)보다 RP매매의 영향이 유동성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큰 것이 보통이다. 기준금리가 제로금리(0%)에 근접했을 경우에는 통화량을 조절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한은이 전일 발표한 조치에 따라 증권사와 증권금융에게 6조원 규모 RP를 매입하면 분명 시중 유동성이 6조원 늘어난다. 그러나 기준금리는 여전히 연 3%이므로 한은은 이를 유지해야 한다. 단순하게 보면 한은은 이를 위해 자신들이 보유한 RP를 다시 6조원 어치만큼 시장에 되팔아 유동성을 빨아들여야 한다. 즉 단기간에는 시장에 6조원 규모 유동성이 풀리지만, 곧 한은이 공개시장운영을 통해 해당 유동성을 흡수하게 된다는 뜻이다. 해당 기간이 물가에 영향을 주지 않을 만큼 짧다면 "통화정책 기조에 배치되지 않는다"는 한은의 설명은 맞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어차피 다시 흡수할 유동성을 왜 시장에 공급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기준금리를 유지하기 위해 시장에 푼 자금을 금세 회수해야 한다면 왜 굳이 유동성을 확대하는 것일까.

한은이 유동성을 공급하는 기관과 흡수하는 기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은이 6조원 규모 RP를 매입하는 기관은 증권사와 증권금융이다. 최근 레고랜드 사태로 자금위기를 겪고 있어 이를 지원하기 위해서다. RP 매입을 통해 한은의 유동성을 공급받게 된다. 반면 은행들은 공개시장운영을 통해 유동성이 한은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한은이 공개시장운영을 할 때 통상 시중은행을 대상으로 실시하기 때문이다. 즉 해당 조치는 은행의 유동성을 증권사로 이동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한은의 조치가 이에 그쳤다면 은행 입장에서는 불만이 있을 수 있다. 증권사에 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에 공급되는 유동성을 줄이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RP 매매 대상에 은행채와 공공기관채를 추가하고 차액결제이해용 담보증권 제공비율 인상을 유예한 것은 이에 대응한 조치로 풀이된다. 각 시중은행은 매일 오전 11시 보유계좌간 발생한 이체거래를 합산해 차액을 정산하는데 이를 은행간 차액결제라 한다. 각 은행들은 유동성 부족으로 차액결제가 불이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은이 정하는 차액결제 담보비율에 따라 담보증권을 맡겨야 한다. 담보비율 인상 계획을 유예해 주면 은행에서 유동성이 덜 사라지는 효과가 발생한다. 당초 한은은 국제기준(PFMI, 금융시장인프라에 관한 원칙)에 따라 차액결제이행용 담보비율을 2023년 2월 80%, 2024년 2월 90%, 2025년 2월 100%로 올릴 계획이었다.

담보비율 인상 유예로 은행의 담보 부담이 7조5000억원 가량 완화된다는 점도 공교롭다. 한은이 증권사에 대해 시행하는 RP 매입 규모가 6조원이기 때문이다.

한은 관계자는 "RP 매입은 이쪽(은행) 자금을 저쪽(증권사)에 주는 것이지 실제로 돈을 푸는 게 아니다"라며 "기준금리 3%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한은이 하는 역할은 RP 매입을 통해 (자금이) 부족한 곳에 쏴주고 혈액순환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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