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랜드 사태가 금융시장을 강타했다. 10월 회사채 순발행액은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06년 이후 최저치(-4조8379억원)였다. 채권시장에선 "돈이 말랐다"고 아우성이다.
'돈맥경화'의 발단이 된 레고랜드 채무보증 불이행 규모는 2050억원이었다. 작은 금액은 아니지만 전체 채권시장에 비하면 그리 큰 비중도 아니다. 그런데도 회사채·단기금융 시장은 지금 왜 흔들리고 있는 걸까. 진짜 이유는 장단기 금리차와 '카운터파트 리스크'(거래상대방 위험)에 있다.
4일 금융투자협회(이하 금투협)에 따르면 10월 회사채 순발행액은 -4조8379억원으로 집계됐다. 순발행액은 회사채 발행액에서 상환액을 뺀 수치를 말한다. 금투협이 관련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06년 이후 가장 많은 금액이 순상환된 것이다. 이는 기존 채권에 대한 차환발행(이미 발행한 채권을 갚기 위해 새로 채권을 발행하는 것)이 어려워졌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회사채·단기금융시장이 불안해진 것은 긴축적 통화정책으로 시장 전체의 유동성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기준금리 상승으로 금리 수준 자체가 올랐다는 점도 부담이지만 더 큰 문제는 장단기 금리차가 축소됐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8월부터 지난달까지 8번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한은 기준금리는 1년3개월 만에 기존 연 0.5%에서 3%로 2.5%포인트 상승했다.
기준금리는 금융시장에서 한은이 7일물 RP(환매조건부채권)를 매입할 때 고정입찰금리로 쓰인다. RP란 되사는 것을 약정한 채권을 말한다. 금융시장이 정상적으로 움직일 때 기준금리가 인상되면 만기가 짧은 초단기 채권에서 3개월물, 1년물, 3년물, 5년물, 10년물 등 만기가 긴 채권으로 금리인상 효과가 파급된다.
문제는 단기금리가 상승하는 만큼 장기금리가 오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단기금리가 통화정책에 민감하다면 장기금리는 한 국가의 향후 경제성장률 전망을 반영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와 미중갈등 심화, 주요국 중앙은행들의 긴축적 통화정책 등으로 세계경제 전망이 밝지 않은 상황이라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의 경기가 쉽게 개선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금리인상 등의 영향으로 내수에 대한 전망도 어둡다. 장기금리가 단기금리에 비해 덜 오른 이유다.
자연스레 장단기 금리차는 크게 줄었다. 한은이 이번 금리인상 흐름에서 처음으로 기준금리를 인상했던 지난해 8월26일 장단기 금리차(국채 10년물-3년물)는 0.53%포인트였으나 지난 3일 0.039%포인트로 좁혀졌다. 지난달 17일에는 장단기 금리차가 -0.024%포인트로 오히려 장기물 금리가 낮은 역전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기업과 개인에 회사채 매입·대출 등을 통해 자금을 공급하는 금융기관들은 금리가 낮은 단기로(요구불 예금, 단기채권 등) 자금을 조달해 장기로 유동성을 공급한다. 두 채권간의 금리차를 순이자마진 또는 예대마진이라 부른다. 순이자마진이 낮아지면 금융기관 입장에서 시장에 자금을 공급할 유인이 줄어들게 된다.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장단기 금리차 축소가 시장 전체에 공급되는 유동성을 줄이는 현상을 부른 것이다.
그렇다면 돈을 빌리려는 기업·증권사 등이 이자를 더 많이 내면 돈을 빌릴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국채 3년물과 'AA-'등급 회사채 3년물간 신용스프레드는 지난해 8월26일 0.438%포인트에서 지난 3일 1.458%포인트로 3배 넘게 뛰었다. 기업들이 3년 만기 회사채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지난 8월보다 국채 대비 금리를 최소 1%포인트 더 지급해야 한다는 뜻이다.
9월까지는 시장이 위축됐던 것은 사실이나 국채보다 신용도가 낮은 회사채 발행자가 이자를 더 주는 방식으로 버틸 수 있었다. 금투협에 따르면 8월과 9월 회사채 순발행액은 각각 6291억원, 6568억원을 기록했다. 채권 발행액이 상환액보다 많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레고랜드 사태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강원도는 지난달 28일 법원에 레고랜드 사업주체인 강원중도개발공사(GJC)에 대한 기업회생을 신청했다. GJC가 발행한 2050억원 규모 ABCP(자산유동화기업어음) 상환을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해당 채권은 강원도가 지급보증을 한 바 있다.
부도처리된 ABCP의 규모가 전체 시장 규모에 비해 크지는 않았으나 시장에 큰 충격을 줬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전체 회사채 잔액은 9월말 기준 643조2145억원이다. CP(기업어금) 잔액은 238조5104억원을 기록했다.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상환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지자체 보증 채권이 채무불이행되며 투자자들의 위험회피심리가 대폭 확대된 때문이다. 레고랜드 사태 이후 투자자들이 높은 이자보다 돈을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는 카운터파트 리스크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은행채와 한전채 등 신용등급이 최고수준(AAA)인 채권들의 발행량이 늘어나며 일반 회사채 시장 자금경색은 가중됐다. 신용도가 높은 채권들이 일반회사채에 비해 크게 낮지 않은 금리로 발행되며 투자자금이 은행채와 한전채 등으로 쏠렸기 때문이다.
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해 은행채는 51조2600억원, 한전채는 23조9000억원 발행됐다. 채권시장이 얼어붙은 지난 9~10월 은행채는 11조9600억원, 한전채는 5조1400억원이 발행됐다. 발행금리도 낮지 않았다. 금투협에 따르면 지난달 20일 발행된 '한국전력공사채권1300'(만기 3년) 표면금리는 5.9%에 달했다. 같은 날 발행된 '한국수출입금융 2210자-이표-3' 채권(만기 3년) 표면금리는 5.5%를 기록했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한전과 수출입은행 신용등급은 모두 AAA(안정적)이다. 최고 신용등급 채권을 5%대 중후반의 금리로 투자할 수 있었던 셈이다.
한 채권시장 관계자는 "한동안 채권 딜러들이 장이 열리면 은행채부터 사고 보는 상황이었다"며 "수익률이 낮지 않은데 신용등급이 높기 때문으로 일반 회사채는 상대적으로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한은이 지난달 27일 대출 적격담보증권과 차액결제이행용 담보증권, 공개시장운영 RP 매매 대상증권에 은행채와 한전 등 9개 공공기관 발행 채권을 포함하기로 한 것은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적격담보 대상 증권에 은행채, 공공기관채를 추가하면 금융기관들은 해당 채권을 한은에 담보로 주고 자신들이 맡겼던 국채, 통안채 등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금융기관에 추가로 유동성이 공급되지는 않지만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등 규제에 대응하기 위한 은행채 추가발행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한전도 한숨을 돌릴 수 있다.
문제는 기관 투자자들 중 이미 '북클로징(장부마감)'에 들어간 곳이 많다는 것이다. 북클로징이란 회계연도 장부의 마감을 의미한다. 통상 11월말에 실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올해는 상대적으로 빠른 시기에 북클로징이 시작됐다. 북클로징이 시작되면 주식이나 채권 거래가 줄어들게 되고 자연스레 증시 전체 거래대금과 거래량도 감소하게 된다.
오창섭 현대차증권 연구원은 "국내 3대 딜링기관이라고 하는 은행, 증권사, 자산운용사들 중 북클로징을 시작한 곳이 많다"며 "자금을 구하는 곳은 많은데 공급해줄 곳이 부족하고 모든 돈이 은행으로 쏠리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