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변량 20kg, 변비 때문에 사망?…약물 의존도 높았던 '로큰롤 황제'[뉴스속오늘]

박다영 기자
2025.08.16 06:00
[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미국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 데뷔 앨범 표지 사진

1977년 8월 16일. '로큰롤의 황제'라고 불리던 미국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망했다. 향년 42세.

공식 사인은 심장마비, 실제로는 변비?…7개월간 8000여개 약 처방받아

엘비스 프레슬리는 1977년 8월 16일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의 저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공식 사인이 심장 마비였지만 엘비스의 주치의였던 조지 니코플러스 박사는 앨비스의 진짜 사인이 '만성변비'라고 주장했다. 부검 당시 몸 안에 4개월 묵은 숙변이 있었으며 대변량만 20kg이 넘게 나왔다고 한다.

그는 변비가 주요 사인으로 고려될 정도로 생전 건강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약물 의존도가 높았다. 2년 동안 수면제만 1만9000회를 처방받을 정도로 수면제를 달고 살았다. 이는 하루 20번, 매달 600번이 이상 복용할 수 있는 수치다.

수면제 외에도 마지막 7개월 동안 최소 8805개의 알약, 주사제를 처방받았다. 혈액에서는 아편 약물이 높은 수치로 검출됐다. 그가 약물 의존도가 높았던 이유는 과도한 욕망, 스트레스, 과로, 우울증, 두통, 불면 등 여러 질병 때문이었다. 약물 남용으로 체내 장기들은 제기능을 하지 못하게 됐다.

사망 직전 엘비스 프레슬리의 모습

평소 식습관도 좋지 않은 데다가 식탐은 많았다. 엘비스의 최애 음식은 '피넛버터 샌드위치'인데 빵에 땅콩버터를 바르고 그 위에 블루베리 잼을 도포한 후 베이컨을 구워 올린 것이었다. 샌드위치 하나의 칼로리가 9000kcal에 달했는데 엘비스는 한 번에 4인분씩 먹었다고 한다.

데뷔싱글부터 1위 '대박'…영화도 30여편

엘비스는 1933년 미시시피주 이스트투펄로라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13살 때 테네시 주 멤피스로 이사를 가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낸다. 멤피스는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는 곳이라 백인인 엘비스는 자연스럽게 흑인의 감성과 음감을 체득하게 됐다.

그는 교회를 다니면서 음악적 영감을 키웠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학교에 매일 기타를 들고 등교해 점심시간마다 연주하며 노래했다.

1953년 7월 18세가 된 그는 어머니에게 음반을 녹음해 선물을 주려고 동네 레코딩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우연히 그의 노래를 들은 레코드 회사의 직원이 그의 목소리에 큰 감동을 받고 사장인 샘 필립스에게 엘비스를 소개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가수의 꿈을 키워나갔다. 필립스와 함께 데모곡을 만들고 트레이닝을 받다가 그를 떠나 대형 음반사인 RCA 빅터레코드의 수장인 톰 파커와 손을 잡고 1956년 1월 '하트브레이크 호텔(Heartbreak Hotel)'을 발매했다. 이 앨범은 데뷔 싱글이었음에도 빌보드 싱글차트 1위를 차지했다.

데뷔와 함께 스타가 된 엘비스는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CBS '스테이지쇼'에 출연해 인지도를 높였다. 같은 해 데뷔 앨범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를 내놓았는데 이 앨범 역시 1956년 미국 빌보드 앨범 1위에 올랐다.

내놓는 앨범마다 기록을 갈아치웠다. 같은해 10월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발표해 큰 사랑을 받았고, 이 곡과 같은 이름의 영화에 주연을 맡아 영화배우로도 데뷔했다.

슈퍼스타로 자리매김 한 엘비스는 18개월간 군 복무를 하는 동안에도 '하드 헤디드 우먼(Hard headed woman)' 등으로 공백기간이 무색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의 백인 남성이 흑인의 전유물이었던 로큰롤 음악에 맞춰 파격적인 춤을 추는 모습은 전 세계적으로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영화배우 활동도 이어갔다. 러브 미 텐더를 포함해 10년 간 30여편의 영화를 찍었다. 1961년에는 한국에서 엘비스가 출연하고 주제가를 부른 영화 '블루 하와이'가 개봉됐다. 블루 하와이의 주제곡은 엘비스의 곡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캔트 헬프 펄링 인 러브(Can't Help Falling in Love)'다.

세계 최초 인공위성서 공연 생중계…이후 인기는 나락으로

1967년 5월 엘비스는 군 복무 중 만난 11살 연하 프리실라 앤 프레슬리와 결혼했고 이듬해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를 품에 안았다. 마리는 이후 '팝의 황제'인 마이클 잭슨과 결혼한다.

엘비스는 결혼 후에도 1972년 'Burning Love'(1972년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2위)를 발표해 히트시키며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1973년에는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생중계된 자선 공연 '엘비스: 알로하 프롬 하와이'를 진행했다. 당시 40개국에서 약 15억명이 동시에 공연을 시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8만5000달러(약 1억 1645만원)가 기금으로 모였다.

그러나 그의 인기는 하와이 공연 이후 나락으로 떨어졌다.

같은 해 아내와 합의 이혼을 했다. 앨비스의 외도가 이혼 사유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혼에서 온 상실감 때문에 그는 폭식하게 됐다. 한때 74kg이었던 몸무게는 117kg까지 늘어났다. 그는 잠에 들기 위해 수면제를, 잠에서 깨기 위해 각성제를 반복적으로 복용했고 이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변비로 인해 1975년부터는 대변을 거의 보지 못해 몸이 퉁퉁 부어올랐다. 주치의가 '항문 이식수술'을 권했지만 앨비스는 망설이다가 끝내 수술을 받지 않았고 여러 합병증을 앓게 됐다.

'로큰롤' 대중화시킨 황제…딸은 10대부터 마약에

엘비스는 흑백 인종차별이 심각하던 시대에 흑인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로큰롤'을 대중화시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인물로 평가된다. 팝, 코러빌리, 컨트리, 가스펠 등 음악 장르 발전에도 기여했다.

사망 후에도 여러 기록을 세웠다. 그는 1972년에 열린 제14회 그래미상 시상식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고 사후인 1986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1998년 컨트리음악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2006년 그가 살았던 그레이스랜드는 미국 국가문화재로 등록됐다.

사망한 지 50년이 다 돼가는데도 현역 가수에 뒤지지 않는 수익을 벌고 있다. 포브스가 사후 수익 순위를 집계한 2001년 이래로 한 번도 순위권에 빠진 적이 없으며 마이클 잭슨 사망 전까진 1위를 도맡았다.

엘비스의 딸 리사 마리 플레슬리는 2023년 장폐색으로 사망했다.

리사는 4살 때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떨어졌고, 9살에 아버지 엘비스를 떠나보냈다.

리사는 10대 시절부터 마약에 손을 대 일평생 재활센터를 오갔다. 대니 커프, 마이클 잭슨, 니콜라스 케이지, 마이클 록우드 등과 4번 결혼했고 4번 이혼했다. 2020년에는 아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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