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의 연기가 뛰어나다는 건, 대한민국이 다 아는 하나마나 한 소리다. 그럼에도 그의 신작이 나오면 우리는 그런 하나마나 한 상찬을 되풀이하게 된다. ‘명량’ 이후 좀처럼 흥행을 터트리지 못했던 최민식은 디즈니플러스 ‘카지노’에서 뱃살마저 연기를 하는 듯한 ‘한국형 돈 콜레오네’ 차무식과 두 번째 천만영화 ‘파묘’의 김상덕으로 돌아와 우리를 매료시켰고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그리고 올해, 첫 넷플릭스 시리즈 ‘맨 끝줄 소년’의 허문오가 되어 나타났다.
‘맨 끝줄 소년’의 허문오는 최민식이 그간 맡아왔던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렬한 포스의 캐릭터들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연서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인 허문오는 수십 년 전 한 권의 소설책을 냈을 뿐, 차기작을 쓰지 못한 실패한 소설가다. 학생들의 과제에 ‘쓰레기’라는 악평을 서슴없이 남길 만큼 괴팍하지만, 사실 대학 동기이자 첫사랑을 빼앗아 간 인기 소설가 김수훈(허준호)에게 깊은 열등감을 숨기고 사는 인물. 그런 허문오 앞에 뛰어난 작문 실력을 보이는 전자공학과 학부생 이강(최현욱)이 나타난다.
이강은 우연히 알게 된 김세윤(이진우)의 가족에 끌려 일부러 세윤과 친구가 되어 그 집안에 침투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과제에 흥미진진하게 풀어놓는다. 허문오는 이강의 작문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에 특히 흥미를 보인다. 과거 김수훈에게 ‘쓸 이야기가 없으면 그냥 안 써도 되지 않나’라는 다분히 모욕적인 말을 들으며 상처를 입었던 허문오는, 이강의 이야기에 단단히 매료돼 그에게 비밀 문학수업을 제의한다. 물론 그 제의는 불순하다. 제자의 문학적 재능을 이끌어주겠다는 순수한 스승의 욕심이 아니라, 제자의 성공으로 스승인 자신이 돋보이고자 하는 실패한 소설가의 욕망, 명예욕, 인정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불순한 마음에서 시작된 문학수업은 점점 허문오를 파멸로 이끈다. 이강에게 관찰과 관음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던 허문오였으나, 어느 순간 이강이 ‘다음에 계속’으로 이야기를 끊을 때마다 감질나 하며 뒷이야기를 재촉하는 ‘천일야화’ 속 왕의 심정이 되어 이야기를 재촉한다. 그뿐인가. 이강의 이야기를 계속 듣겠다는 욕심으로 이강이 제안하는 범죄도 저지르게 된다. 이후로도 선을 넘은 이강의 행동에 더 이상 문학수업을 하지 않겠다 선언하지만, 세윤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서 오히려 취재를 빙자해 리얼리티를 확보하라며 범죄를 기획하고 부추기는 단계에 이른다. 시청자의 입장에선 ‘이게 대체 뭔가’ 하는 마음이 들 터.
최민식의 연기가 빛을 발하는 건, 이 ‘이게 대체 뭔가’ 싶은 이성적인 마음을 스르륵 휘감아버린다는 거다. 아마 ‘맨 끝줄 소년’을 정주행한 많은 이들이 ‘교수라는 사람이 고작 스무 살짜리 학생한테 저렇게까지 휘둘린다고?’ 하는 의문이 들 텐데, 분명 설정 자체엔 의구심이 남는다. 그러나 최민식이 분한 허문오는 이강에게 휘둘리며 처절하게 눈이 멀어버리는 과정을 오롯이 자신의 연기로 납득시킨다. 최민식의 연기가 얼마나 압도적인지는, 어느 순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고 망연자실해진 허문오가 “우리 은주”를 되뇌는 장면에서 실감하게 된다. 만약 최민식이 아닌 다른 이가 허문오가 되어 “우리 은주”를 말한다면 나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릴 것 같거든.
인간 내면의 바닥까지 긁어 내려가며 폭주하는 허문오의 서사를, 차마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지 않은 추한 노욕에 사로잡힌 허문오의 지질한 감정을, 최민식은 명불허전의 연기로 펼쳐낸다. 호불호가 있을 수 있는 결말의 장면은 또 어떻고. 파우스트 앞에 다시 나타난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이강을 바라보는 허문오의 그 눈빛, 그 표정, 그 미세하게 전율하는 얼굴 근육!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감정과 대사를 함축적으로 토해내는 것이 느껴질 테다. 최민식의 인생작 ‘올드보이’의 오대수를 떠올리는 이들도 많을 것.
최민식이 창창한 젊음의 최현욱과 대립 구도로 연기 호흡을 맞추는 걸 보는 것도 이 작품의 묘미. 최민식은 유지태(올드보이), 류승범(주먹이 운다), 이병헌(악마를 보았다), 한석규(천문: 하늘에 묻는다), 김동휘(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등 여러 작품에서 후배 남자 배우들과 투톱 구도를 형성하며 극의 긴장감을 이끌어 왔다. 2002년생인 최현욱은 그간 최민식이 합을 맞춰본 후배들 중 가장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 그럼에도 최현욱은 대배우의 포스에 밀리기는커녕, 의뭉스러운 얼굴 아래 섬세한 표정과 눈빛 변화로 순간순간 폭발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며 극의 긴장감을 지속시키며 감탄을 자아낸다. 이강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하는 허문오를 보면서 “최현욱의 리액션을 잘하면 (허문오) 캐릭터가 살겠구나 했다. 현욱이의 연기를 놓치지 않고 캐치하려고 했다”는 최민식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느끼게 될 듯.
‘맨 끝줄 소년’은 잘 알다시피 후안 마요르가 작가의 동명 희곡이 원작으로, 수 차례 연극으로 무대에 오른 것은 물론 2012년 프랑수와 오종 감독의 ‘인 더 하우스’로도 만들어져 호평을 받았다. 최민식 스스로 “이렇게 문학적 향기가 나는 작품이 그리웠다”고 할 만큼 인물 간의 관계와 심리에 초점을 맞춘 문학적 서사의 묵직함은 꽤나 매력적이다. ‘괜찮아, 사랑이야’ ‘라이브’ ‘우리들의 블루스’ 등 인간의 심리를 섬세하게 조율해 온 김규태 PD의 연출력도 ‘맨 끝줄 소년’을 신뢰할 수 있는 요소일 것이다. 그러나 ‘맨 끝줄 소년’을 추천하는 이유는 사실 아주 단순하다. 연기 고트(GOAT) 최민식의 연기를 볼 수 있다.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할까? 거기에 더해 최민식에 밀리지 않고 대등한 존재감을 보이는 최현욱의 연기를 감상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
나는 믿는다. ‘더 파더’로 아카데미 연기상 최고령 수상을 거머쥔 안소니 홉킨스와 같은 역사를 최민식도 써내려 갈 거라고. 그러니, 민식이 형, 우리랑 오래도록 함께해줘.
정수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