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세우스의 '식상'한 결단이 우리시대에 주는 교훈

정지우(문화평론가) ize 기자
2026.08.19 08:50

운명의 힘으로 고향에 도착하는 결말에 담긴 감독의 메시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는 인간의 오만을 버리고 운명에 순응함으로써 고향에 도착했다. 영화는 인간이 이성과 의지로 삶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내려놓고 삶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중요성을 시사했다. 이러한 순응과 환대의 태도는 삶의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세상과 화해를 이루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사진='오디세이' 예고편 영상 캡처 

크리스토퍼 놀런이 영화 '오디세이'에서 그려낸 오디세우스(맷 데이먼)의 귀환은 다소 식상한 점이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신에게 저항하려는 인간의 오만 때문에 귀환길에 부하들을 모두 잃고 10여년간 바다를 헤매게 된다. 극중에서 오디세우스가 방황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것은 칼립소(샤를리즈 테론)의 조언 덕분이다.

표류한 오디세우스와 수 년간 함께 지내던 여인 칼립소는 인간으로서의 오만을 버리고 신에게, 운명에게 순응하라고 말한다. "당신은 운명을 통제하길 바라지만, 이 일은 통제할 수 없어." 그러면서 "그냥 자신을 운명에 던져"라고 하고, 오디세우스는 그 말을 따라 뗏목을 타고 바다에 몸을 던진다. 운명은 그를 고향에 데려다준다.

원작에서는 이후 오디세우스가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최종적으로 고향에 도착하는 과정이 그려지지만, 영화에서는 그대로 오디세우스가 운명의 힘으로 고향에 이르게 된다. 오만을 버리고, 운명에 몸을 맡기자마자 신들의 인도로 고향으로 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나 예측 가능한 전개이자, 고전적인 교훈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보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식상함'에서 다시금 우리 시대의 삶을 반추해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시대에는 아무래도 신의 손길이나 운명의 이끌림을 막연하게 믿는다는 건 불가능해보인다. 신만 믿고 가만히 있다가는, 포모(FOMO)의 시대에 금방 '벼락거지'가 될지도 모르고, AI의 폭풍 속에서 직업과 직장까지 잃게 모른다는 불안이 오히려 팽배해 있다. 서둘러 인간 '이성'의 판단력을 믿고, 남들을 쫓아 약삭빠르고 재빠르게 '대세'에 합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모든 걸 잃을 것만 같다.

그러나 요즘 나는 이런 시대에야말로, 바로 저 '고전적인 교훈'을 조금은 기억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살아가다 보면, 삶이라는 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여러모로 경험한다. 건강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인 의사가 갑자기 암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하고, 법률 전문가인 변호사가 고소를 당해 범죄자가 되기도 한다. 재테크 전문가들이 파산하거나, 갑작스레 찾아온 재난에 의해 삶의 기반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인간 삶을 인간이 이성과 의지의 힘으로,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환상일지 모른다.

마치 세이렌의 유혹에 맞서 선체 기둥에 자신의 몸을 꽁꽁 묶어달라고 외친 오디세우스처럼, 우리는 이성과 계획으로 우리 삶을 통제하려 하지만, 기껏해야 할 수 있는 건 말 그대로 '버티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그럴 때, 완벽한 통제에 대한 욕망을 일부 내려놓고, 다가오는 삶에 어느 정도 '순응'하고자 하는 태도야말로, 삶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다.

사진제공=유니버설픽쳐스

그 '순응'의 구체적 원리라고 한다면, 영화에서도 반복적으로 말하는 제우스의 법칙 즉 '환대'를 떠올릴 수 있다. 우리는 타인들을 바라볼 때 최대한 이익을 계산하여, 나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려 한다. 그러나 어느 날, 삶에 도래한 타자를 환대하듯 받아들이고, 그의 이끌림을 따라간다면, 그 타자의 얼굴을 마주한다면, 삶의 '또 다른' 길이 보이진 않을까. 사랑과 우정 앞에 계산보다는 '열린 태도'를 취하다 보면, 우리 삶이 나도 모르게 '더 나은' 것으로 흘러갈 가능성도 있진 않을까.

아마도 크리스토퍼 놀란은 그런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었던 것 같다. 과거 그의 여러 작품들에서는, 인간이 자기의 지성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이 끝까지 밀고 나가는 모습이 보여지곤 했다. '인셉션'에서 주인공 코브(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무의식까지 완벽히 설계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그 덫에 걸린 것 같은 결말을 맞이한다. '메멘토'에서 역시 레너드(가이 피어스)는 자신의 단기기억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객관적 기록에 의존한다고 자부하지만, 끝내 스스로를 속이는 편리한 살인 기계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어느 순간, 그런 시도를 포기하고 운명에 자신을 맡기면서, 고향에 돌아가 가족을 다시 만나는 '해피엔딩'에 도달한다. 그 과정이 너무나 환상적이고 낭만적이라, 진실 보다는 허구에 가까워 보이기도 하지만, 나 역시 그러한 가능성을 믿고 싶어진다. 내 인생이 완벽히 통제되지 않는다고 계속 능동적으로 '발악'하기 보다는, 내 몸을 이 삶에 '맡기는' 수동적인 태도를 이 삶에 조금은 가져보고 싶은 것이다.

물론, 그런 태도가 곧 삶의 능동성이나 주체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통제 가능한 것, 이를테면, 필요한 싸움과 노력은 해나가되, 어느 면에서는 삶의 결과와 흐름을 보다 온전히 받아들여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삶과도, 이 세상과도 조금 더 친숙한 화해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신들과도 한결 친하게 지내며, 삶의 희로애락을 받아들이고, 마땅히 이 삶에서 일어나야 할 일들을 받아들이게 될지 모른다. 여기에서 나는 다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릴케의 한 구절을 되새긴다.

"마음 속에 늘 충분한 인내심을 지니십시오. 또한 소박한 마음으로 믿으십시오. 어려운 것을 더욱더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고는 삶이 당신에게 벌어지는 대로 놔두십시오. 내 말을 믿으십시오. 삶은 어떠한 경우에도 옳습니다."(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김재혁 역, 고려대학교출판부)

정지우(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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