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준혁은 잘생긴 얼굴을 좀처럼 편하게 쓰지 않는다.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에서도 그 반듯한 얼굴에 직장인의 피로를 얹었다. 몇 장면을 따라가다 보면 외모보다 사정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도 제 몫 이상을 해내고, 제 감정은 제일 나중으로 미룬 사람으로. 이번에 이준혁이 보여주는 얼굴은 그렇게 닳아 있다.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는 로또 1등에 당첨된 팀장 공은태(이준혁)가 13억 원을 품고 다시 출근하는 이야기다. 입사 7년 만에 팀장이 된 은태는 위로는 양보를 요구받고, 아래로는 자신보다 선배인 양준호(서현우) 대리의 무례를 견딘다. 직함에 어울리는 존중을 받지 못해도 묵묵히 업무를 처리한다.
은태는 속내를 시원하게 털어놓는 인물이 아니다. 불편한 일을 겪어도 넘기고, 항의해야 할 순간에도 물러난다. 그러나 배우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을 관객이 알아볼 만큼은 보여줘야 한다. 무표정이 무감정으로 읽히지 않도록 하는 섬세한 조절이 필요하다.
이준혁은 회사에서 경직돼 있던 은태가 퇴근 후 혼자만의 시간에 조금씩 느슨해지는 모습으로 그 차이를 만든다. 대단한 행복이 찾아온 것도 아닌데 사람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 평온해진다. 무엇 때문에 지쳤는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온종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전해진다.
그렇게 눌러뒀던 감정은 당첨 번호 앞에서 터진다. 숫자를 거듭 확인하고 소리를 지르며 밤을 새우는 모습, 사직서를 던지고 고급 세단을 타는 상상에서는 코미디의 박자가 살아난다. 이준혁은 우스워지는 데 주저함이 없다. 앞서 은태의 건조한 일상을 충분히 쌓았기에 이 요란한 기쁨에도 마음이 따라간다.
더 흥미로운 대목은 다시 출근한 뒤다. 로또 당첨으로 마음의 여유를 얻은 은태는 양준호에게 처음으로 제대로 화를 낸다. "나도 너만큼 불편해"라는 말에는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뒤로 미뤄뒀던 자신의 감정이 실린다. 이준혁은 참아온 감정을 솔직하게 쏟아내는 은태의 모습으로 후련함을 안긴다.
이준혁은 분노의 뒤처리까지 연기한다. 은태는 할 말을 하고도 옥상에서 자신이 지나쳤는지 곱씹는다. 돈이 생겨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지만, 관계를 걱정하던 성정까지 바뀐 것은 아니다. 이준혁은 후련함 뒤에 찾아오는 근심을 놓치지 않는다.
서현우와의 대면에서는 듣는 연기가 빛난다. "팀장님은 팀장님이 피해자라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에 은태의 경계가 풀린다. 자신의 억울함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관계를 마주한 것이다. 이준혁은 허망해진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아내며 상대의 사정이 들어올 자리를 만든다. 갈등과 화해를 연결하는 힘이 이 짧은 반응에 있다.
공은태의 변화에는 늘 이전의 자신이 조금씩 남아 있다. 화를 내는 사람에게서 참았던 시간이 보이고, 상대의 상처를 이해하는 사람에게서 아직 아물지 않은 제 상처가 읽힌다. 이준혁은 감정을 장면마다 갈아 끼우지 않고 앞선 감정의 흔적을 다음 장면으로 가져간다. 그래서 은태는 로또에 당첨된 뒤에도 여전히 곁의 동료처럼 느껴진다.
이런 공은태를 보고 있으면 이준혁의 전작들이 새삼 낯설어진다. '범죄도시3'에서는 20kg 넘게 체중을 늘려 부패 경찰 주성철의 거친 위압감을 만들었다. '왕과 사는 남자'에서는 짧은 등장 안에 금성대군의 기품과 굽히지 않는 충심을 담았다. 상대를 압박하던 얼굴, 신념을 지키던 얼굴이 이제 일과 사람에 지쳐 피로가 짙게 밴 K-직장인의 얼굴이 됐다.
그 변화는 외형만 바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위협하는 인물에게 필요한 힘과 참는 인물에게 필요한 힘은 다르다. 이준혁은 역할마다 감정을 드러낼 정도와 상대의 말에 반응하는 방식을 새로 정한다. 익숙한 매력을 반복해도 될 자리에서 매번 다른 어려움을 감당한 결과 작품마다 기억에 남는 인상도 달라졌다.
이준혁은 제작발표회에서 "배우는 매 작품, 대박으로 인생이 바뀔까 생각할 때가 있다. 현실은 그렇지 않고 일은 계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은태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일을 좋아한다고 했다. 2006년 데뷔 이후 이어온 연기 생활을 떠올리면 이 말의 무게가 느껴진다. 흥행한 작품이 있어도 다음 인물의 마음은 다시 처음부터 익혀야 한다. 그 수고를 생략하지 않은 시간이 지금의 공은태를 떠받친다.
은태의 통장에 들어온 13억 원은 뜻밖의 행운이지만, 그를 살아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이준혁의 연기는 오랜 축적의 결과다. 침묵을 읽게 하고, 환희에 웃게 하고, 화낸 뒤의 얼굴까지 궁금하게 만드는 힘. 잘생긴 외모는 눈길을 끌지만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매번 그 얼굴에 다른 삶을 새기는 연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