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와 ‘탑건’ 시리즈의 톰 크루즈는 잊어라. ‘디거’의 톰 크루즈는 우리가 알고 있던 이단 헌트와 매버릭과는 백만 광년은 떨어진 모습이다. 백발이 성성한 탐욕스러운 배불뚝이 노인의 톰 크루즈라니. 그런데 잠깐, 우리가 그의 젊은 외양에 속고 있었지만 그는 이미 60대이다. 그리고 또 우리가 그의 화려한 액션 연기에 홀려 있었지만 톰 크루즈는 액션 이상으로 빼어난 연기의 소유자다. ‘디거’는 톰 크루즈의 비주얼은 가리고 연기는 파고들며 관객의 눈과 귀를 홀린다.
먼저, 이 영화가 가급적 어떠한 사전 정보 없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란 언질을 강력하게 남긴다. 이 글에서도 영화 예고편에 나온 내용 외에는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을 최대한 자제했다. 그만큼 ‘디거’는 파면 팔수록 뭐가 나올지, 그 나온 것을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소화할지가 관건인 영화다. 반전 자체로 승부를 보는 영화는 아니지만, 모르는 상태에서 봐야 더 의미심장하게 곱씹는 지점들이 있기 때문.
영화는 석유 재벌 디거 록웰(톰 크루즈)이 자신의 대저택에서 깨어나는 평범한 듯한 하루로 시작한다. 석유 시추 시설을 설치한 그린란드에서 빙하의 균열이 심상치 않음을 경고하는 보고가 오지만, 안전보다 돈이 더 중요한 그는 이를 대수롭게 않게 넘겨 버린다. 그리고 그 묵살은 전 세계를 뒤흔드는 거대한 재난을 불러오게 된다. 이때 책임자인 디거는 어떤 선택을 할까? 놀랍게도 그는 자신이 구원자임을 자처한다.
탐욕스러운 석유 재벌 디거 록웰을 앞세운 ‘디거’는 얼핏 자본주의의 민낯을 겨냥하는 영화인가 싶지만, 그 외에도 숱한 것들을 조롱하며 풍자한다. 기후 위기와 이상기온이라는 당장 현실에 산재해 있는 문제를 소재로 삼으면서 자본주의뿐 아니라 현실감각이라곤 쥐뿔도 없으면서 탐욕을 부리는 권력의 허상, 그리고 직면한 재앙에 고성을 내지르지만 별반 다를 것 없는 대중의 민낯까지 정조준한다. 누구라도 이 조준 앞에서 자유로울 순 없지만, 가장 뼈아플 것은 역시 미국사회가 아닐까 싶다. 특히 파리기후협약을 두 차례가 탈퇴하며 기후변화를 사기로 일축해왔던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이 영화를 싫어할 것이 분명하다. 디거 록웰뿐 아니라 영화 속 미국 대통령 컴슨(존 굿맨)을 보면 트럼프의 기이한 행태가 아주 강렬하게 오버랩되거든.
모든 장면장면이 인상적이지만, 재난이 터진 뒤 이를 의논하기 위해 미국 대통령과 각 부처 장관들, 그리고 디거 록웰이 모인 밀실 회의 장면과 디거가 10여 분간 궤변의 열변을 토하는 유럽의회 장면은 압도적이다. 밀실 회의 장면이 현실과 괴리된 권력자들의 추한 모습을 그로테스크한 웃음으로 그려냈다면, 유럽의회 장면은 말도 안 되는 말을 지껄이며 구원자를 자처하는 디거의 궤변에 속수무책 휘말리는 우리가 오버랩되며 씁쓸해진다. 하긴, 석유 없이 지속 불가능한 삶의 안락을 누릴 수 있느냐는 질문에 누가 쉽게 답을 하겠는가.
이런 명장면들은 배우들의 휘몰아치는 연기로 완성된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얼굴과 목소리와 자세를 갖추고 압도적인 대사량으로 디거 록웰을 완성시킨 톰 크루즈는 경이롭다. 잘생긴 얼굴과 뛰어난 액션에 가려져 있던 그의 연기와 파격 변신만으로도 ‘디거’는 볼 가치가 충분하다. 록웰 회사에서 총안전 책임을 맡고 있는 가네쉬 박사 역의 리즈 아메드, 디거의 이복여동생 엠마 역을 맡은 산드라 휠러, 부통령 역의 마이클 스툴바그와 케니 역의 제시 플레먼스 등 배우들의 앙상블 연기도 훌륭하다. 그리고 존 굿맨. 컴슨 대통령 역의 존 굿맨은 마지막 모습까지 인상적이다.
‘디거’를 연출한 감독이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라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데뷔작 아모레스 페로스’로 시작해 ‘21그램’ ‘바벨’ ‘버드맨’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등 여러 작품에서 과감하고 집요한 도전을 서슴지 않았던 만큼, ‘디거’ 또한 평범한 블랙코미디로 그치지 않는다. 풍자와 함께 형식의 반전을 통해 거대한 농담이 관객의 폐부를 찌르는 칼날이 되는 과정을 129분간 펼쳐낸다. ‘버드맨’과 ‘레버넌트’로 미국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한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베즈키 또한 함께했다.
영화를 보고 나면 톰 크루즈가 왜 이 영화를 선택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톰 크루즈는 이미 배우로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영광을 누렸다고 볼 수 있다. 부와 명성은 말할 것도 없고, ‘7월 4일생’ ‘제리 맥과이어’ ‘매그놀리아’로 골든글러브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을 수상했고, 4년 전에는 칸국제영화제 명예 황금종려상, 올해 아카데미에선 공로상을 수상했다. 그럼에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트로피가 없던 그에게 어쩌면 ‘디거’는 트로피를 안길 수도 있지 않을까? 리어나도 디프리오가 이냐리투 감독의 ‘레버넌트’로 기어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처럼.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의 블랙코미디가 무척 마음에 들지만, 조롱과 풍자는 종이 한 장 차이인 만큼 어떤 이들은 이 영화의 풍자가 조롱처럼 느껴지며 못내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만악의 근원이 러시아나 중국에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라면 특히 그럴지도. 지독한 농담과 풍자로 점철한 블랙코미디 ‘디거’는 10월 3일 개봉한다. 15세 이상 관람가. 이번 영화로 13번째 내한하며 할리우드 배우 최다 기록을 쓴 톰 아저씨의 파격 변신을 목도할 기회다.
정수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