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이 뛸 데가 없어요."
지난 10일 늦은 오후 서울 종로구 경복고등학교 앞에선 갑작스런 혼란이 빚어졌다. 운동장을 이용하려던 아이들과 부모들이 정문 앞에서 발길을 돌리면서다. 일부 주민들은 왜 운동장을 이용할 수 없는지 학교 관리인에게 따지듯 물었고 아이들은 "조금만 더 놀겠다"며 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오후 6시가 넘은 시간에도 아이들과 자전거를 끌고 온 가족, 테니스를 치러 온 주민들이 학교 앞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들은 정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경복고 체육시설 외부 개방 시간이 기존 '일몰 시까지'에서 '주말 오후 6시까지'로 변경됐기 때문이다.
이 시간 학교를 찾은 주민 대부분이 운영시간 변경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학교 벽면에 작은 안내문이 붙어 있었지만 눈에 띄지 않았고 뒤늦게 운영시간 변경 사실을 알게 된 주민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운동장에서 놀던 아이들과 부모들도 오후 6시가 되자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서는 "조금만 더 있게 해달라"는 아이들과 "이제 나와야 한다"고 달래는 부모들 사이 실랑이도 이어졌다.
평창동에 거주하는 40대 A씨는 "평창동은 아이들이 축구를 하거나 자전거를 탈 만한 공간이 없다"며 "그동안 경복고 운동장이 사실상 동네 공원 역할을 해왔는데 갑자기 주말에는 오후 6시까지만 운영한다고 하니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요즘은 6시가 넘어도 밝고 선선해서 아이들이 뛰어놀기 좋은 시간인데 이용 시간이 줄어 주민들 아쉬움이 크다"고 했다.
또 다른 평창동 주민 B씨는 "주변에 산이 많고 자연환경이 좋아 아이 키우려고 이사 왔는데 막상 와보니 아이들 관련 인프라가 너무 부족하다"며 "계속 살아야 하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해야 하나 고민될 정도"라고 말했다.
인근 주민인 C씨도 "강북에서 아이 키우기 힘들다는 말을 실감한다"며 "서울시는 개방형 공공시설 확대를 이야기하는데 현실은 오히려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줄고 있다"고 지적했다.
현장을 찾은 주민들은 단순히 운동장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종로구 자체가 서울에서 대표적인 '아이 없는 동네'로 변하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실제 서울시 등록인구 통계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종로구의 0~14세 유소년 인구는 8200여명으로 서울 자치구 가운데 중구와 함께 최하위권이다. 송파구(7만7000여명), 강남구(5만2000여명) 등과 비교하면 격차가 크다. 송파구의 약 10분의 1 수준이다.
도심 업무지구 성격이 강한 종로구는 고령화와 1~2인 가구 비중이 높아 가족 단위 거주 비율이 낮다. 그나마 무악동, 사직동, 평창동 등이 종로구 내에서는 아이가 상대적으로 많은 지역으로 꼽히지만 주민들은 체육시설 등 생활 인프라 부족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왔다.
특히 평창동은 저밀 주거지 특성상 대단지 아파트 지역처럼 어린이 놀이터나 대규모 생활체육시설이 충분하지 않다. 경복고 운동장은 사실상 일대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공 공간 역할을 해왔다는 게 주민들 설명이다.
한 주민은 "미리 제대로 공지만 했어도 헛걸음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제 날씨가 더워지면 저녁 시간 운동장 이용 수요가 더 많아질 텐데 대체 공간도 없는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이에 대해 서울시 측은 체육시설 개방학교 운영 지침은 존재하지만 세부 개방 시간은 학교 재량 사항이라는 입장이다. 체육시설 개방학교는 학교가 서울시로부터 운동장 등 체육시설의 유지·보수 예산을 지원받는 대신 지역 주민에게 시설을 개방하는 제도다. 주간 15시간 이상 개방 등이 기본 조건으로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