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금융가의 심장부인 시티오브런던. 지하철 뱅크역을 나오면 영란은행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도로가 뻗어 나가는 오거리가 펼쳐진다. NH농협은행 런던지점은 이곳에서 걸어서 1~2분 거리인 롬바드 스트리트에 자리 잡고 있다. 영국 금융의 상징과 글로벌 은행들이 밀집한 거리 한복판에서 농협은행은 유럽 시장의 문법을 익히고 있다.
지난해 7월 문을 연 농협은행 런던지점이 유럽 투자금융(IB) 시장에서 현지 딜 발굴과 심사 노하우를 쌓고 있다. 농협은행은 2021년 런던사무소를 연 뒤 지난해 7월 지점 설립 인가를 획득해 영업을 개시했다. 유럽·중동·아프리카(EMEA) 영업의 '첫 단추'를 잘 꿰기 위해 당장의 외형 확대보다 딜을 보는 눈과 현지 네트워크를 축적하는 데 집중하는 모습이다.
농협은행 런던지점이 주목하는 것은 미국과 다른 유럽 IB 시장의 문법이다. 미국에서는 블랙록 등 대형 운용사나 제너럴파트너(GP)를 통해 딜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반면 유럽은 상업은행들이 차주와 직접 호흡하며 대출 구조를 짜고 위험 요인을 검토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중요하게 작동한다. 어느 쪽이 틀린 게 아니라 시장마다 딜이 만들어지고 검증되는 방식이 다르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런던지점은 단순히 글로벌 금융기관이 가져오는 딜에 참여하는 수준을 넘어서 해당 딜이 어떤 구조로 짜였는지, 어떤 이유로 투자할 만한지, 반대로 어떤 이유로 참여가 어려운지까지 내부적으로 기록하고 회고한다. 성사된 딜뿐 아니라 지정학 변수나 구조상 한계 등으로 추진이 어려웠던 딜도 검토 근거를 남기는 식이다. 현지 담당자들 대화에선 "배웠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잘된 딜에서도 배우고, 어려웠던 딜에서도 배운다는 의미다.
런던지점은 개점 이후 영국 2건, 네덜란드 2건, 아일랜드 1건, 폴란드 1건, 나이지리아 1건 등에 투자했다. 지난해 12월에는 나이지리아에 본사를 둔 다자간 금융기관인 아프리카금융공사에 4500만달러(약 700억원) 규모의 기업대출을 실행했다. 출범 초기인 만큼 영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자산을 쌓고, 중동·아프리카 지역으로 점진적으로 확장하겠다는 전략이다.
투자금융 분야에서는 에너지, 통신, 데이터센터 등 인프라 분야를 우선적으로 보고 있다. 유럽에서는 에너지 공급 불안정과 에너지 안보 강화 흐름이 부각되면서 LNG 수입터미널, 폐기물처리시설, 친환경 에너지 인프라 등 전력 공급 인프라 관련 대출 기회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AI) 확산으로 광통신 투자와 AI 데이터센터 투자 수요도 커지고 있다.
실제 런던지점은 최근 유럽 내 데이터센터 개발·운영사인 퓨어데이터센터그룹이 암스테르담과 더블린 지역에서 추진하는 데이터센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 참여했다. 선순위대출 규모는 7000만유로(약 1226억원)다. 암스테르담과 더블린은 유럽 데이터센터 핵심 시장인 'FLAP-D' 권역에 포함된다. 런던지점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데이터센터 투자 기회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유럽 내 재정 적자 심화로 도로, 철도, 공항, 폐기물처리시설 등 민관투자협력사업(PPP) 수요가 확대될 가능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인프라금융과 데이터센터 외에도 항공기금융, 인수금융, 부동산금융에서 섹터와 딜별로 선별적으로 참여할 계획이다. 부동산금융은 수요가 안정적인 임대목적 주택사업(BTR)과 학생 기숙사 사업(PBSA), 항공기금융은 임차인의 신용도와 리스 항공사의 국적, 자산 내용연수 등을 따져 접근하고 있다.
현지 딜 검토의 실무 축에는 유은주 농협은행 부지점장이 있다. 유 부지점장은 농협은행에서 대기업RM센터, PE단, 여신심사부, CIB심사부를 거쳤고 현재 IB사업부 소속 IB런던데스크로 근무하고 있다. 대기업 여신, 사모투자, 심사, CIB 업무를 두루 경험한 만큼 런던 현지에서 발굴되는 딜의 구조와 리스크를 따지는 데 역할을 하고 있다. 런던지점이 딜별로 검토 사유와 보류 사유를 남기며 회고 학습을 이어가는 것도 이런 심사 경험과 맞닿아 있다.
한국계 금융기관에 대한 현지 인식 변화도 런던지점에는 기회다. 과거 글로벌 딜에서 자금을 다 모으지 못하면 남은 물량이 한국 금융기관으로 넘어온다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달라지고 있다. 한국 금융기관도 약속한 기일과 금액을 맞추고 반복적인 거래를 통해 신뢰를 쌓는 플레이어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기업이 경쟁력을 인정받으면서 금융기관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졌다.
농협은행 입장에서는 아직 현지 인지도를 더 쌓아야 하는 과제도 있다. 그동안 농협은행은 한국과 홍콩에 사무소를 둔 글로벌 금융기관 네트워크에 상대적으로 무게를 둔 만큼, 런던 현지 우량 딜 접근성에는 한계가 있었다. 런던지점은 영국, 유럽 본토, 중동 권역별 주요 글로벌 금융기관을 추리고 직접 접점을 늘리는 방식으로 이를 보완하고 있다.
장덕진 농협은행 런던지점장은 "발로 뛰는 IR을 통해 현지 글로벌 금융기관에 농협은행을 알리고 실제 투자 및 거래와 연결시키려 노력하고 있다"며 "아직 1년이 채 되지 않은 지점인 만큼, 외형적인 극적 성장보다 자산 및 조달 소스를 다양하게 구성하는 게 리스크 관리 및 안정적 성장의 주요 지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중장기 전략은 EMEA 지역을 대상으로 한 농협은행 유럽사업본부로 성장하는 것"이라며 "향후 3년 내 우량 여신자산 10억달러를 쌓고 조달과 채권운용 등 자체 역량을 갖춰 기초 체력을 다질 계획"이라고 했다.
런던지점은 점차 은행 간 시장과 단기 자금시장, 양도성예금증서(CD)·중기채권(MTN) 발행 등을 활용해 현지 조달 기반을 넓힌다는 방침이다. 유럽 IB 시장의 문법을 익히는 과정 자체를 농협은행 글로벌 영업의 자산으로 만들겠다는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