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총량규제 딜레마'에 빠졌다. 가계부채를 억제하기 위해 강도 높은 총량관리를 유지한다는 입장이지만 하반기에만 7만 세대, 26조원 규모의 잔금대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총량규제 예외를 인정하면서 사실상 무력화됐다는 평가다. 주택공급 확대라는 정책 목표와 가계대출 관리라는 정책 목표가 충돌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9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은 전날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과 회의를 열고 하반기 예정된 잔금대출이 차질없이 집행될 수 있도록 요청했다. 금융위는 하반기 약 7만 세대에 26조원 규모의 잔금대출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금융당국이 추산한 26조원이 모두 신규 가계대출은 아니다. 상당 부분은 이미 실행된 중도금대출이 잔금대출로 전환되는 물량이다. 은행권에서는 통상적인 중도금·잔금대출 구조를 감안하면 실제 신규 여신은 26조원 중 3조7000억~11조원(약 15~40%) 수준으로 추산한다. 개별 사업장마다 중도금대출 비율과 최종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이 달라 차이가 있지만, 이미 집행된 중도금대출을 제외하면 최종 잔금대출로 순증하는 규모는 이 정도라는 설명이다.
이 같은 추산에도 신규 여신은 올해 5대 은행의 가계대출 증가 목표치인 약 4조3000억원과 맞먹거나 이를 웃돌 수 있는 규모다. 금융당국은 잔금대출 뿐만 아니라 주택공급 확대와 관련된 이주비와 중도금 대출도 예외 허용을 검토하고 있다. 이주비, 중도금, 잔금까지 이른바 집단대출을 모두 예외로 인정할 경우 올해 가계대출 총량관리 목표를 지킨다고 하더라도 '예외'가 '목표'를 훨씬 초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이날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잔금대출을 예외로 허용한 것은) 정책을 전환한 게 아니다"라며 "지금도 잔금대출은 규제 내에서 받을 수 있지만 총량관리를 했더니 은행이 조여 버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잔금대출을 풀어준 것은 "은행과 협의해 합당하게 집행될 수 있도록 만든 것"일 뿐 정책을 바꾼게 아니라는 설명이다.
하지만 금융권에서는 총량규제의 정책 목적과 실수요자 보호가 충돌하면서 사실상 금융당국이 딜레마에 빠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가계부채를 관리하기 위해 총량규제를 유지하면 입주 예정자들의 잔금 마련이 어려워지고, 반대로 잔금대출을 예외로 인정하면 총량관리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형평성 논란도 제기된다. 수천 세대가 동시에 입주하는 분양 단지는 분양받을 당시 예정된 대출이라는 점에서 예외 적용을 받지만, 기존 주택을 개별적으로 매수한 실수요자는 여전히 총량규제의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경우의 차이는 1~2년 전에 주택구입을 계획했느냐, 올해 계약했느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총량규제는 1~2년 전에도 있었고, 달라진 건 이재명 대통령이 참석한 토론회에서 큰 소리를 냈느냐 아니냐 뿐"이라며 "같은 실수요자라도 개인이나 집단이냐에 따라 대출 가능 여부가 달라졌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