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6년간 국내 제약·바이오업계가 해외에 신약 후보물질을 기술수출했다가 중도 해지된 계약규모가 9조원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개별 기업은 물론 K바이오의 국제적 신뢰마저 흔들릴 정도의 대규모 계약 파기 사례도 이어진다. 진단키트로 대표되는 K바이오의 명성을 이어가려면 기술수출 한계를 뛰어넘는 범정부 차원의 치밀한 혁신신약 육성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015년 후 기술수출 계약 9조 증발=15일 제약·바이오업계에 따르면 신약 개발 관련 기술수출이 본격화된 2015년 이후 국내 기업의 기술수출 건수는 공개된 것만 50건을 넘는다. 해마다 10건 안팎의 계약이 체결된다.
이중 소위 ‘중박’의 기준이라 평가하는 3000억원을 넘는 계약은 25건이다. 여기서 수주한 계약금액만 24조8873억원에 이른다. 하지만 적지 않은 계약이 중도에 중단됐다. 계약 해지나 파기 수순에 들어간 사례는 알려진 것만 6건, 계약규모는 9조413억이다. 전체 계약금액의 36.3%에 해당하는 수치다.
기술수출 중단 사례는 한미약품이 4건으로 가장 많다. 최근 다국적 제약사 사노피아벤티스가 당뇨병 신약 후보물질 ‘에페글레나타이드’ 등에 대한 계약해지를 통보하면서 3조원 이상이 날라 갔다. 2015년 계약 체결 당시 계약금액은 39억유로(5조1845억원)였다. 이외에 미국 얀센과 일라이릴리, 독일 베링거인겔하임과의 계약도 해지됐다.
골관절염 유전자세포치료제 인보사를 개발한 코오롱생명과학도 2016년 일본 미쓰비시다나베와 맺은 5000억원 규모의 계약과 2018년 미국 먼디파마와 체결한 6680억원 규모의 계약이 사실상 파기됐다.
상대적으로 자본력이 부족한 국내 제약·바이오업계는 그동안 기술수출을 통해 성장해왔다. 신약 개발은 하나의 후보물질에 대해 임상까지 1000억~2000억원의 개발비가 들고 추가로 막대한 마케팅 비용과 지속성장 비용이 든다. 글로벌에서 이 같은 능력을 보유한 회사는 화이자, 로슈, 노바티스, 존슨앤존슨, 사노피, 암젠 등 손에 꼽는다. 일례로 화이자의 연구개발(R&D) 비용은 5조~10조원이지만 국내 정부 정책자금과 전체 제약사의 R&D 비용은 다 합쳐 2조원에 못 미친다.
기술수출 중도 해지는 이 같은 성장 과정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과도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대형 제약사 한 관계자는 “여러 후보물질 중 신약으로 성공하는 확률은 0.02%에 불과하다”며 “숱한 실패 사례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한계 뛰어넘을 스케일업 전략 필요=전문가들은 K-바이오가 글로벌 리더로 성장하기 위해선 애써 개발 또는 수출한 신약후보물질들이 사장되지 않도록 후속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이를 뒷받침할 범정부 차원의 맞춤형 스케일업 전략이 필요하다고 충고한다.
일례로 글로벌 제약기업과의 공동연구 사례에 대한 지원이다. 정부가 신약개발을 육성하기 위해 메가펀드를 조성한다면 이 돈을 빅 파마와 손잡은 기업에 지원하는 식이다.
묵현상 범부처신약개발사업단장은 “자동차와 반도체의 성장 방식처럼 우리 기업이 빅 파마로 성장하려면 그들의 노하우를 가까이서 배워야 한다”며 “연구, 임상 등에 빅 파마와 공동투자하고 지분을 일부 보유하는 기업에 지원이 집중돼야 한다”고 충고했다.
현재 정부의 R&D 지원 기준을 보면 지분의 절반 이상을 우리 기업이 보유해야 한다. 이 지분 기준을 30% 이하로 낮춰 글로벌 기업과의 협업이 활발하게 일어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기업이 지속적으로 R&D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해외 기업과의 기술수출에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원희목 한국제약바이오협회장은 “국내 기업간 기술거래에 적용하고 있는 세제 혜택을 글로벌 제약사들과의 계약에도 확대해주면 자체 혁신신약 개발의 원동력이 생길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다양한 파이프라인을 갖추고 R&D에 지속 투자할 수 있는 기초 체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장기적 지원과 생태계 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