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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투자는 실패를 전제로 설계된 자본이다. 열 곳에 투자해 아홉이 무너져도 하나가 크게 성공하면 되는 구조, 그래서 '모험자본'이라 불린다. 그런데 국내 벤처투자 관행은 모험과 거리가 멀다. 과도하게 설계된 투자자 안전 장치가 회사의 실패를 고스란히 창업자 개인의 파산으로 연결시킨다.
이는 벤처투자의 실패를 쉽게 용인하지 못하는 국내 투자 생태계의 풍토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정부 역시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표준계약서 개정에 나서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정작 정책금융기관의 정책 기조가 이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벤처투자 계약서에서 창업자 연대보증은 한때 기본값이었다. 최근 제도적으로는 사라지는 추세지만 '이해관계인'이라는 이름으로 최대주주나 경영진 개인이 사실상 같은 의무를 지는 우회로가 남아 있다. 투자자 보유지분을 창업자에게 강제 매각할 수 있는 풋옵션(주식매도청구권), 다수 주주가 회사 매각을 결정하면 창업자 지분까지 강제로 팔아야 하는 드래그얼롱(동반매도청구권) 등도 투자자 보호를 위해 창업자에게 부담을 지우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 밖에도 기업가치가 떨어진 상태로 후속 투자를 받을 때 기존 투자자의 전환가격을 낮춰 지분율을 방어해주는 리픽싱(전환가액 조정), 실제 손해 규모와 무관하게 미리 정해놓은 금액을 투자자에게 물어내게 하는 위약벌 조항 등도 창업자를 압박하는 악습으로 꼽힌다.
국내에서 벤처투자 수단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상환전환우선주(RCPS)도 마찬가지다. 투자자는 조건이 안 맞으면 투자금을 돌려받을 권리(상환권)와, 유리한 시점에 보통주로 갈아탈 권리(전환권)를 동시에 쥔다.
김성훈 법무법인 미션 변호사는 "상환권은 배당가능 이익 범위 안에서만 가능한데 스타트업에 그 정도의 이익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 파괴적인 조항들은 전환권과 리픽싱"이라며 "다운 라운드(기업가치가 낮아진 채 진행하는 후속투자)로 투자를 유치할 때 리픽싱이 걸리면 지배구조가 뒤집히고, 그 탓에 기존 투자자에게 리픽싱 포기나 면제를 요청하다 협조가 안 돼 후속 투자 자체가 무산되는 일도 벌어진다"고 전했다.
국내와 달리 실리콘밸리 등 해외 벤처투자 업계에서는 스타트업 투자 대부분이 실패한다는 공감대가 깔려 있다. 개별 실패를 창업자 개인 책임으로 환원하는 계약이 자리 잡기 어려운 이유다. 미국 벤처캐피탈(VC) 업계에서는 애초에 연대보증 조항이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게 현지 투자자들의 설명이다.
한국은 사정이 다르다. 순수 민간 VC부터 정책자금이 섞인 펀드, 금융지주 계열 투자사까지 출자자 스펙트럼이 넓고 저마다 감내할 수 있는 손실의 폭도 다르다. 실패를 용인한다는 합의가 생태계 전체에 균일하게 깔리지 못한 것이다.
한 VC 투자심사역은 "한 개인투자조합에서는 투자와 대출을 구분하지 못한 개인 출자자가 '내 돈 내놓으라'며 심사역 멱살을 잡고 싸우는 경우까지 있었다"며 "비단 개인 투자자만이 아니라 기관 담당자들 역시 투자자가 아닌 채권자처럼 굴 때가 있다"고 꼬집었다.
투자 계약서상 연대보증이나 이해관계인 조항으로 인해 창업자 개인이 책임을 떠안는 사례는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프롭테크 스타트업인 어반베이스 창업자 하진우씨는 연대보증 문제로 투자사 신한캐피탈과 갈등을 빚었다. 콘텐츠 스타트업 오지큐 창업자 신철호씨도 조건부 투자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이해관계인'으로 이름을 올린 뒤 투자받은 금액 90억원과 지연이자 등을 개인 돈으로 갚을 상황에 놓였다.
정부 역시 이 같은 투자자 보호장치를 완화할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중소벤처기업부가 내놓은 벤처투자 표준계약서 개정안은 RCPS 대신 CPS(전환우선주)를 쓰도록 권고한다. 상장을 '반드시 달성해야 할 결과 의무'로 규정하는 대신 '성실히 노력할 의무'로 바꿔 시장 침체 등 외부 요인에 의한 위약벌 사항에서 창업자를 보호하도록 했다.
하지만 계약서에 담기지 않은 문제들이 실제 창업자를 압박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게 스타트업 업계의 목소리다. 풋옵션과 위약벌이 실제로 어떻게 행사되는지는 관리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모태펀드 자펀드가 창업자를 상대로 풋옵션이나 위약벌을 행사하는 실태 역시 모니터링되지 않고 있다.
모태펀드 등 정책금융의 정책기조 역시 투자자들의 '보신주의'를 부추겼다는 비판이 나온다. 투자한 기업의 부실이 불거지면 사후관리를 문제 삼아 운용사를 압박하고, 취득가보다 기업가치가 떨어지면 손상차손을 잡아 관리보수를 깎기도 한다. 운용사들은 출자자가 엄격하게 관리할 것을 요구한다는 이유로 창업자에게 더 강한 안전장치를 요구하고 이는 고스란히 창업자를 옥죄는 독소 조항으로 돌아온다.
김성훈 변호사는 "VC들이 모험자본 역할을 안 하고 채권자처럼 군다는 건 맞지만 그게 꼭 VC들의 악의 때문은 아니다"며 "정책 LP 차원에서 운용사들에게 적절히 판단하고 운용할 재량과 자율권을 주지 않는다면, 운용사 입장에선 눈치를 보고 과도한 안전 조치를 취해 결국 창업 생태계를 망가뜨리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