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오락가락했던 지난달 27일 오전 전남 광양. 여수광양항만공사(YGPA)의 안내선을 타고 도착한 광양항 원료부두에선 20만톤(t)급 화물선 'SM라이온'호 선미에선 생활쓰레기를 내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한달간의 항해에서 발생한 생활쓰레기는 톤백(대형포대) 4~5개 분량. 이 가운덴 요즘 핫한 '옷감'의 재료인 페트(PET)병이 한가득 섞여있었다. 기능성 티셔츠와 가방, 안전조끼 등으로 재탄생하기 위한 페트병의 여정은 이곳에서 시작됐다.
◇선원 1명당 30개씩 나오는 페트병…김포·인천·경북 거쳐 옷감으로
10일 해양수산부와 해양환경공단 등에 따르면 YGPA는 지난해 2월 선박에서 나온 폐페트병과 플라스틱을 업사이클 제품으로 재활용하는 '해양플라스틱 자원순환'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업사이클은 재활용 소재에 디자인 등 부가가치를 더해 새 제품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배우자인 김건희 여사가 최근 스페인 순방 중 현지 업사이클 의류 업체를 방문해 화제가 됐고, 방탄소년단(BTS)의 RM이 폐차에서 나온 가죽으로 만든 업사이클 가방을 사용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YGPA는 선박에서 나오는 생활 플라스틱 폐기물에 주목했다. 통상 30~45일 가량인 항해에서 선원 1인당 배출하는 페트병만 2ℓ(리터) 생수병 5박스(30병)가량. 식료품을 담거나 각종 생활용품을 보관하는 데 사용한 플라스틱 쓰레기도 있다. 이들 폐기물은 배에서 내려져 매립·소각되는 게 일반적이었고, 일부 선박은 바다에 플라스틱을 버리기도 해 해양 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당했다.
YGPA는 해경과 무단 해양배출을 단속하는 한편 선박에 플라스틱 폐기물을 담을 수 있는 별도의 톤백을 제공했다. 항해를 마친 선박에서 나온 폐기물은 유창청소업체(배의 기름 탱크 청소 및 폐기물을 수거·처리를 전담하는 업체)가 수거하는데, 유창청소업체에는 톤백당 3만~4만원씩 추가 처리비용을 지급해 페트병과 일반 플라스틱을 분리·선별하도록 했다. 지난해 시범사업을 시작하고 수거한 플라스틱 폐기물은 톤백 기준 234개, 이에 대한 보조금 900만원가량이 투입됐다.
광양항에서 분리수거된 페트병은 김포로 옮겨져 세척작업을 거친다. 이어 인천에서는 세척한 페트병을 끓는 물에 삶아 남은 염분을 제거한다. 불순물을 제거한 페트병은 경북 고령으로 옮겨서 조각(칩) 형태로 만든 뒤 경북 구미 소재 효성티앤씨 공장에 투입, 의류용 원사(原絲)로 재탄생한다.
YGPA 관계자는 "철이나 종이처럼 플라스틱 폐기물을 재활용할 유인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했다"며 "폐플라스틱을 분류에 금전적 인센티브를 마련해 수거율을 높이고 국내 최초로 세계적인 해양플라스틱 재활용 인증인 컨트롤유니온의 OBP(Ocean Bound Plastic) 인증을 받아 원료의 품질을 보증했다"고 설명했다.
◇일반 제품보다 1.5배 비싼 재생원사 "그렇지만 없어 못 판다"
경북 구미 소재 효성티앤씨 원사 공장문을 여니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공기와 기계 소음이 가득했다. 270도 고온으로 폐페트 플라스틱 칩을 녹인 후 노즐을 통과시킨 실가닥 72개가 원사 한가닥으로 합쳐지는 작업이 진행되는 탓이다.
플라스틱 원료로 의류용 원사를 뽑는 공정은 △석유화학원료인 TPA(테레프탈산)과 EG(에틸렌글리콜)를 섞어 중합체(폴리머)를 만드는 '중합' 공정 △중합공정으로 만든 칩을 건조하는 공정 △칩을 고온으로 녹인 후 찬 바람으로 식혀 합치는 방사(스피닝) 공정 등으로 나뉜다. 여기서 폐페트로 만든 원료를 사용하면 중합 공정을 생략하고 공정에 투입된다.
폐페트 원료는 중합 공정을 거친 일반 원료보다 1.5배가량 비싸다. 분리수거부터 세척, 분쇄까지 여러 공정을 거쳐야하는 탓이다. 공정에서 불순물이 섞이면 원사의 강도를 유지할 수 없어 대규모 불량으로 이어진다. 폐플라스틱은 경제성만 놓고 보면 낙제점에 가까운 원료다.
그럼에도 이곳 공장에서 재생원료로 생산하는 '리젠 제품'은 만드는 족족 팔린다고 한다. 올해 효성티앤씨 구미공장에서 생산예정인 리젠 원사는 1만2000톤(t) 정도다. 500㎖(밀리리터)짜리 생수통 8억5700만개 분량, 여름용 티셔츠 8000만벌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 효성티앤씨 구미공장은 하루 370톤의 원사를 생산할 수 있는데, 3년여 전만해도 2~3%에 불과했던 리젠제품 비중은 현재 10% 수준까지 늘었다고 한다.
효성티앤씨 관계자는 "요즘은 '친환경'이 아니라 '필(必)환경'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며 "소비자가 똑똑하고 윤리적 소비를 택하는 데다, 소비자에 앞서 상품을 분비하는 글로벌 주요 브랜드는 당연하게 친환경 소재 비중을 늘리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바다 미세플라스틱 주범 그물·부표도 옷감으로…폐페트병 용기 선보인다
해수부와 해양환경공단은 YGPA의 해양플라스틱 업사이클링 사업을 시작으로 해양플라스틱을 재활용하기 위한 순환 경제 조성에 착수했다. YGPA의 업사이클링 사업이 재활용이 쉬운 선박 위 생활 플라스틱에 한정됐다면, 어획용 그물과 부표 등 해양 플라스틱 전체로 재활용 범위를 넓히겠다는 의도다.
선박에서 배출되는 플라스틱 폐기물과 달리 바다 속에 들어간 어구는 염분 처리공정이 까다롭다. 염분이 남으면 불량으로 이어지는 플라스틱 공정 탓에 보다 확실하게 염분을 제거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또 여러 종류의 플라스틱이 섞인 그물은 재활용 가능한 소재로 분리하는 것 또한 관건이라고 한다.
해수부는 민간 사업자에 대한 수거 위탁과 보증금제 등을 통해 어구와 부표, 로프(밧줄) 등을 수거한 뒤 해양환경공단 소속 전국 13개 수거사업소에 모을 예정이다. 이렇게 모은 폐기물은 민간의 중간처리 업체로 보내 세척 후 소요기업에 공급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환경부도 올해 2월 폐페트병을 분쇄·세척해 식품용기로 재활용하는 '물질 재활용' 제도를 본격 시행했다. 환경부는 지난해 9월 식품의약품안전처와 협의를 거쳐 식품용기 접촉면에도 재생원료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올해 2월24일 '식품용기 재생원료 기준' 확정·고시해 본격적인 물질 재활용 체계를 마련했다.
한국환경공단에 따르면 헌 병에서 새 병을 만든다는 의미로 일명 'B2B'(Bottle to Bottle)로도 불리는 물질 재활용은 올해 기준 마련으로 연간 800억원 규모 수요가 예상된다. 특히 유럽을 중심으로 친환경 규제가 강화되는 탓에 페트병 사용이 많은 식음료 업체의 경우 일정 비율 이상 재생원료 사용의무가 발생할 수 있어 B2B 시장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한다.
"10년 전과는 확실히 다르다. 2020년을 전후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붐이 일고 글로벌 기업들의 재활용 원사 요구도 커지면서 주문에서도 가시적 증가세가 보인다."
국내 한 섬유업계 관계자가 최근 재활용 원사 시장에 대해 전한 분위기다. 파타고니아, 나이키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지속가능 패션을 표방하고 나서면서 몇 몇 업체가 10여 년 전 기술 개발해 뒀던 시장이 이제 막 열리기 시작했다는 평가들이 나온다.
산업연구원이 지난해 11월 발간한 '친환경·리사이클 섬유패션산업 육성 전략'에 따르면 전세계 재활용 섬유 수요 규모는 2018년 53억3200만달러에서 2026년 80억200만달러(10조3700억원)로 연평균 5.2% 증가할 전망이다. 이는 같은 기간 섬유 전체 수요 증가율(2.9%)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높은 수준이다.
친환경 원사가 우선 적용되는 곳은 의류업체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글로벌 의류 시장 규모(매출액 기준)는 2020년 1조4000억달러에서 2026년 1조9500억달러(2528조원)로 연평균 약 3.4%씩 성장할 전망이다.
물론 2500조원을 훌쩍 넘기는 시장이 기술적으로나 수익성, 제품 수요 측면에서 모두 재활용 의류들로 대체될 순 없다. 스태티스타도 이 가운데 지속가능한 의류 시장 비중은 2020년 3.6%에서 2026년 6.1%(1190억달러·154조원)가 될 것으로 봤다. 지속가능한 의류란 재활용 뿐만 아니라 유기농, 생분해 등 기후대응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의류를 통칭한다.
대표 의류업체들은 대담한 도전들으로 지속가능한 의류 시장 성장세를 뒷받침한다.
파타고니아는 2025년까지 모든 생산 제품을 재활용 또는 재생 가능한 소재로 만들겠다고 밝혔고 H&M은 2030년까지 100% 재활용 또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소재만을 사용, 2040년까지 기후긍정적 기업이 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아디다스는 2024년부터 플라스틱이 사용되는 전 제품에 대해 100% 재활용 폴리에스테르를 활용한다고 밝혔다. 또 패스트패션 대표 기업인 자라도 2025년까지 100% 지속가능 섬유로만 제품을 만들어 판다고 지난 2019년 밝혔었다.
글로벌 대표 패션 기업들이 속속 지속가능 기업이 되겠다고 선언하자 바빠진 것은 섬유기업이다. 특히 글로벌 화학섬유 소재 시장에서 국내 기업이 차지하는 점유율은 2019년 기준 7.3%로 중국(26.3%)에 이은 2위였다. 선진국들이 글로벌 리사이클 표준(GRS), 리사이클 클레임 표준(RCS) 등 재활용 섬유 표준, 인증제도를 도입하고 제조품 가치사슬 전반에서 탄소배출감축을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 섬유기업들도 변신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워질 수 있다.
국내 대표 섬유기업 중에서 효성과 휴비스는 비교적 빨리 재활용 원사 시장에 뛰어들었다.
효성티앤씨는 2008년 폐페트병을 재활용해 폴리에스터 원사(리젠)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다. 석유를 원료로 한 기존 폴리에스터 섬유와 달리 리젠을 페트병을 작게 조각낸 칩에서 실을 추출해낸다. 리젠은 현재 입소문을 타고 의류, 가방 등 다양한 제품에 적용되고 있다.
휴비스는 2009년 재활용 페트 섬유 '에코에버' 생산기술을 확보했다. 이 섬유는 국내 최초로 나이키 공식 공급자로 선정됐다. 휴비스는 지난해 2월에는 국내 최초 리사이클 칩 생산설비를 구축했고 같은해 6월에는 SK케미칼과 손잡고 국내 최초로 화학적 재활용 방식의 폴리에스터 원사(에코에버 CR) 생산에도 성공하는 등 투자를 지속 중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당시에도 '녹색성장' 등 바람을 타고 섬유업계에서 재활용 원사 기술개발이 이뤄졌었지만 경기가 침체됐던 점, 국내에서 원료를 구하기 지금보다 더 어려웠단 탓에 활성화되지 못했다"며 "최근 ESG 붐이 일고 가치소비 환경도 마련되면서 수요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수요 증가세는 매출 수치로도 확인되기 시작했다.
효성티앤씨에 따르면 리젠처럼 폐페트를 재활용해 생산한 합성섬유 제품 매출액은 2018년 106억2300만원에서 2019년 230억5400만원, 2020년 315억1500만원으로 2년 새 세 배 가까이 성장했다. 지난해에도 전년 대비 두 배 가까이 성장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휴비스의 에코에버의 매출액도 2020년 30억원에서 2021년 40억원으로 33% 늘어난 것으로 파악됐다. 올해는 80억원을 기록해 매출 신장률이 전년 대비 두 배에 달할 전망이다.
이들 기업뿐 아니라 태광산업은 대한화섬과 손잡고 재활용 원사 '에이스포라 에코'를 개발했고 도레이첨단소재도 2008년 폐페트병, 폐어망 등을 화학적으로 재활용한 '에코웨이'를 개발했다.
재활용한 친환경 원사의 활용처는 앞으로 더 빠른 속도로 더 다양해질 것이란 전망이다. 패션기업 뿐만 아니라 자동차, 가구, 가전 업체들에서도 탄소감축이 화두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자동차 내장재에 쓰이는 섬유량만 1대당 약 35㎏로 알려진다.
박훈 산업연구원 성장동력산업연구본부 연구위원은 "재활용 원사가 관심받고 있다고 해도 아직은 수익이 나지 않는, 이제 막 시범사업 단계"라며 "원활한 원료 조달이 관건이고 국내 생산시설 구축 등으로 비용을 절감해야 시장도 더 커지고 섬유기업과 완제품 기업 모두 윈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