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2(미국·중국)의 힘겨루기 사이에 끼인 한국 반도체 업계가 쓸 수 있는 대책은 이른바 '양다리 전략'이다.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이하 반도체법)에 포함된 가드레일(안전장치) 협상을 최대한 유리하게 이끌어 내면서도 세계 경제의 다른 한 축인 중국과 관계도 이어가야 한다. 반도체 업계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개별 기업이 의미있는 협상력을 갖기 어려운 만큼 외교적 지원 또한 뒷받침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3일 업계에 따르면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의 보조금 신청을 최대한 늦출 전망이다. 최대한 시간을 벌어 상황을 지켜본 뒤 보조금을 신청하겠다는 현실적인 전략이다. 미국은 지난달 28일 가드레일을 공개하면서 사전 신청서 접수를 시작했고, 본 신청은 이달 31일부터 받는다. 한국 기업으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보조금 신청을 준비하고 있다.
중국에 주요 생산공장을 가동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보조금도 포기할 수도 없는 한국 기업들은 어느쪽도 포기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시간을 끄는 것 말고, 현재로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반대로 보조금을 신청하지 않으면, 세금이나 인·허가 등 현지에서 트집이 잡힐 수도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에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중이다. SK하이닉스는 투자계획만 공개했다.
업계는 미국 상무부의 보조금 가드레일이 공개되면서 셈법은 더 복잡해진 만큼 정부의 외교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지난달 28일 공개된 가드레일에는 한국 기업에 치명적인 일부 독소조항이 포함됐다. 당초 중국과의 기술 패권 다툼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목적에 한국까지 동참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반도체 업계에선 이를 두고 미국에 '뒤통수를 맞았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주요 독소 조항으로 지목되는 기준은 초과이익 환수와 예상 현금(기대수익)흐름 제공, 국방·안보용으로 쓰이는 첨단 반도체 시설 접근권 등이다. 보조금으로 지어지는 생산설비는 미국산 재료를 사용해야하고, 1억5000만 달러(약 2000억원) 이상을 받으면 보육시설도 지어야 한다. 구체적인 초과 이익환수 비율과 기대수익 제공범위 등은 협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390억 달러(약 51조원) 규모 보조금을 빌미로 감당해야 할 무게치고는 과도하다는 게 반도체 업계의 지적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최대한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지만, 미국 정부를 상대로 개별 기업이 대응하는 건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가드레일 예외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정부차원에서 외교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당장 미국과 중국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반도체 생산시설을 '안전지대'로 이전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중국에 있는 반도체 생산시설을 국내나 미국에 우호적인 제3국 등으로 옮기는 대안이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위원은 "중국 공장에서 지금보다 높은 수준의 반도체를 생산하는 건 어려울 수 있다"며 "첨단 제품은 국내에서 생산을 추진하는 등 고민을 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