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화학은 최근 6개의 PVC(폴리염화비닐) 라인 중 두 개를 '초고중합도 PVC' 전용으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기존 PVC 대비 내열성과 내구성이 우수해 전기차 충전기 케이블 등에 활용할 수 있는 스페셜티 소재다. 중국과 중동이 대량생산 가능한 범용 제품인 PVC로는 더이상 시장에서 승부를 보기 힘들다는 판단에서다.
화학 기업들은 이같은 방식의 변화에 매진하고 있다. 백화점식 포트폴리오를 구축해놓고 3~5년 사이 돌아오는 호황 사이클을 기다리는 패러다임은 완전히 무너졌다. 이미 값싼 인건비를 앞세운 중국이 글로벌 에틸렌 증설 물량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COTC(정유·석유화학 통합시설)로 원유에서 화학 제품을 일괄 생산하는 중동의 에틸렌 생산 손익분기점은 K-화학의 3분의1 수준까지 떨어졌다.
화학 업계 관계자들은 "이제는 트렌드 세터가 돼야 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중국과 중동이 따라올 수 없는 빠른 속도로 반도체·전기차·드론 등 미래 혁신 산업에 적용 가능한 스페셜티 제품을 찾아내고, 개발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이 지난 10월 '화학산업의 날'에서 "주도적으로 속도감있는 변화와 혁신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밝힌 것과 일맥상통하는 방향이다.
K-화학은 스페셜티로의 전환에 시동을 걸었다. LG화학은 ABS(고부가합성수지) 부문에서 선제적 대응을 하며 글로벌 점유율 1위에 올랐다. 특히 열변형 저항성이 뛰어난 내열 ABS에서의 압도적 경쟁력을 바탕으로 자동차 내·외장재 시장을 공략한다. 반도체 세정액 'C3-IPA' 역시 LG화학의 기대주다. 롯데케미칼은 고강성 난연 PP(폴리프로필렌)를 개발하는 것에 성공했다. 화재 변수가 있는 전기차 배터리용 소재로 각광받는다.
한화솔루션은 고속 성장하는 글로벌 전력 케이블 시장 공략을 위해 E/HV(초고압·고압)급 반도전 컴파운드 생산능력을 1만톤 규모로 확대했다. 금호석유화학은 SSBR(고기능성 합성고무)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중이다. 주로 전기차 타이어 등에 적용된다. 내마모성·안전성·연비를 향상시켜 줄 수 있는 스페셜티다. 코오롱인더스트리의 경우 PMR(고순도 방향족계 석유수지)을 내세워 △고성능 타이어 △전기 케이블 시장에 대응한다. 애경케미칼은 '슈퍼섬유' 아라미드의 원료인 TPC 생산라인 구축에 나섰고 SK케미칼은 재활용 플라스틱 에서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바뀐 시장 상황에 대응해야 하기에 조직·인적 개편도 불가피하다. 이미 올들어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 SK지오센트릭 등의 CEO(최고경영자)가 교체됐다. 롯데 화학군의 경우 총 13명의 CEO 중 10명이 바뀌었고 약 30%에 달하는 임원들이 퇴임했다. LG화학은 여수 NCC(납사분해설비) 2공장을 쿠웨이트석유공사에 매각하고 JV(합작회사)를 설립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금호석유화학은 올해 초 중국 기업과 합작 라텍스 공장의 지분 50%를 전량 팔았다.
이런 개편을 통해 가벼워진 조직은 속도감있게 스페셜티로 전환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실탄 마련을 통한 신소재 투자도 가능하다. 과감하면서도 빠른 사업 조정이 필수다. 그만큼 중국 등의 추격이 매섭다. 예컨대 최근까지 스페셜티로 분류됐던 태양광용 소재인 POE(폴리올레핀 엘라스토머)의 경우 중국의 공격적인 생산 확대에 이젠 범용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화학 업계 관계자는 "안주하고 앉아있을 시간이 없다"며 "화학 기업들이 전기차 소재 등 신사업을 추진하다가 캐즘(Chasm, 일시적 수요 둔화) 영향을 받아 실적이 더욱 악화된 측면도 있지만, 미래에 성장이 예정된 시장이라면 그 방향으로 속도감있게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