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사태가 1주일 이상 지속되면서 원유 수급과 고유가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정유사들은 정부의 물가 안정 기조와 발맞춰 주유소 경유·휘발유 공급가 인하에 나서면서도, 비중동 원유 단기 계약 등의 카드를 검토하면서 수급 대책 마련을 추진하고 있다.
8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복수의 정유사들은 미국 등에서 단기 원유 물량 계약을 체결하는 옵션을 살펴보고 있다. 지난달 28일 미국·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한 이후 호르무즈 해협이 닫히며 원유 수급에 적신호가 켜지자 리스크 완화 차원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이란측이 호르무즈 해협 봉쇄 조치를 취한 후 중동 원유 수급로는 사실상 막혔다. 한국은 원유의 70.7%를 중동에서 수급하고 있고, 이 물량 대부분은 이란 영해인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따르면 HD현대오일뱅크·GS칼텍스 등의 국내 유조선 7척이 호르무즈 해협에 묶여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정유사들은 국내에 일반적으로 4~5주치의 원유 재고를 확보하고 있다. 1년 단위의 장기 계약 60%, 그외에 단기 계약 40% 정도로 포트폴리오가 구성돼있다. 이란 사태 장기화로 원유 재고가 줄어들 경우 정유사들이 가동률을 낮추면서 동시에 비중동 지역 단기 물량 확보에 더욱 속도를 내는 상황이 연출될 것으로 보인다. 단기 계약 특성상 도입 단가가 상대적으로 비싼 경우가 많은 것은 변수다. 다만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로 인해 미국산 원유의 가격 경쟁력이 충분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이란 사태가 1주일을 넘어 2~3주차에 접어들면 원유 수급 문제의 파장이 더욱 커질 것"이라며 "단기 물량 비중을 확대하는게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플랜은 아니지만, 현실적인 수급 문제 해결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비축유 활용이나 원유 수송 우회경로 확보 등 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전했다.
원유 수급 불안에 따른 고유가의 여파도 점점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란 사태 발발 후 브렌트유 가격은 배럴당 90달러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씨티그룹은 올해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82달러 이상을 유지할 경우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이 0.45%포인트 하락하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60%포인트 오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철강·화학 등 '산업의 쌀'을 생산하는 업종부터 고유가의 유탄을 맞을 것으로 우려된다. 여천NCC는 지난 4일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나프타 원료를 공급받지 못했다며 주요 고객사들에게 제품 공급 이행 지연 및 조정과 함께 불가항력(Force Majeure)을 선언했다.
주유소 휘발유·경유 가격 상승은 직접적 물가 부담으로 다가온다. 일단 정유4사(SK이노베이션·GS칼텍스·S-OIL·HD현대오일뱅크)는 경유·휘발유의 공급가격 인하 쪽으로 가닥 잡았지만 국제 유가 상승 추세와 수급 불안이 지속된다면 주유소 가격이 2000원대까지 치솟는 것은 시간 문제일 수밖에 없다. 결국 근본적으로 유가 폭등의 여파를 최소화하려면 원유 수급 문제라도 어느 정도 해결해야 한다. 정부는 최근 UAE(아랍에미리트)로부터 총 600만 배럴 이상의 원유 긴급 도입을 성사시키는 등 관련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이란 사태 봉합의 실마리가 아직 보이지 않아 고유가 상황의 장기화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주유소 가격 인상 등 문제의 핵심 역시 원유 수급에 있기 때문에 정부와 기업이 발맞춰 대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