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사태 장기화로 정유업계가 '원가·원유 조달·재고'라는 3중고에 직면했다. 유가 변동성 확대에 따른 리스크를 정유사들이 그대로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중장기 사업 불확실성이 증폭되고 있다.
31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아시아 정유사들과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는 아랍 라이트(경질유) 5월 인도분 관련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아랍 라이트는 국내 정유사들이 많이 수입하는 유종 중 하나로, 여타 유종 가격의 대표 기준점 격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홍해 방면 얀부항을 통해 수출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문제는 아랍 라이트 가격이 폭등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아람코에서 아시아로 수출하는 원유에 추가로 붙는 OSP(공식판매가격) 프리미엄의 경우 배럴당 40달러 수준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사상 처음으로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이뤄진 가운데 전쟁 장기화 가능성까지 불거지며 프리미엄이 4월분(배럴당 2.5달러) 대비 상승폭을 키운 것으로 분석된다.
일반적으로 아람코의 월간 계약 가격은 두바이유(혹은 오만유)에 프리미엄을 가감해 산정한다. 현재 두바이유가 배럴당 약 120달러에 거래되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5월 도입가가 배럴당 160달러대에 달할 수 있는 셈이다. 정유사들 입장에서는 아랍 라이트 5월분의 구매에 선뜻 나서기 힘든 상황이다. 전쟁이 그 사이에 끝나버린다면 비싸게 들여온 원유로 만든 제품을 값싸게 팔아야 하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어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배럴당 40달러라면 전례 없는 수준의 프리미엄이 적용되는 것으로, 다른 유종도 큰 폭의 상향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며 "정유사들 입장에서는 구매 물량을 축소할 수밖에 없고, 이렇게 된다면 가동률 하향에 따른 석유 제품 공급 축소가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지속되는 전쟁 속에 원유 조달 자체도 어려워지고 있다. 지난달 28일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이후 원유 가격이 폭등한 가운데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자 글로벌 정유사들이 일제히 스팟(단기 현물매매) 시장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중동 대체 원유 조달을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단기 물량 가격 또한 상승하는 추세로 알려졌다. 원유 수급 이슈는 산업의 불확실성으로 직결된다. 윤재성 하나증권 연구원은 "국내 정유·석유화학 업체들의 보유 원재료도 4월 중순이면 크게 소진될 수 있다"며 "4월 중순에서 말 사이 가동률 조정 가능성이 대두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재고 문제 역시 부각되고 있다. 국내 정유사들은 도입 원가와 시가를 비교해 낮은 금액으로 재고자산을 평가하는 '저가법'을 통해 회계 처리를 하고 있다. 가격 하락 국면에는 손실을 조기에 반영해야 하는 구조다. 만약 2분기 중 종전이 되고 유가가 떨어질 경우 원유·석유제품 가격 하락에 따른 대규모 재고평가손실이 무조건 발생하게 된다. 1분기 정제마진 상승 등의 요인으로 일시적 호실적을 거둔다고 해도 그 이후에는 실적 하락 국면을 필연적으로 거쳐야 한다.
전쟁이 당장 끝난다고 해도 이같이 리스크는 단번에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걸프 지역 정제설비 정상화에만 약 3개월이 필요하기 때문에 공급망 혼란이 상당 기간 지속될 수 있어서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환율까지 1달러 당 1500원대로 오른 상황 속에서 원가와 원유 조달, 재고 리스크가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다"며 "전쟁이 길어질수록 원가 부담과 조달 불안이 커지고 휴전이나 종전이 될 경우에는 재고손실이 발생하는 답답한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