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찾은 부산 HJ중공업 영도조선소 도크(선박 건조·수리 공간)는 포화상태에 가까웠다. 작업자들은 안벽부터 빼곡히 채운 총 10여척의 선박 제작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블록 단계 선박까지 포함하면 20척이 넘는 선박이 수주를 위해 건조 중인 상황이다. 조선업 슈퍼사이클의 온기가 중형 조선소 현장까지 퍼지고 있는 셈이다.
다만 중형 조선소는 물이 들어오고 있는데 노를 젓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RG(선수금환급보증)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RG는 조선사가 선박을 제때 인도하지 못할 경우 은행이 선주에게 선수금을 대신 지급할 것을 보증하는 제도로 선박 수주의 필수 조건이다. RG를 적기에 확보하지 못하면 선박 수주 자체가 불가하거나, 계약이 파기될 수도 있다.
문제는 국책은행들의 RG 발급이 대형 조선사에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말 기준 대형 조선사(HD현대중공업·HD현대삼호·삼성중공업·한화오션)에 대한 RG 한도는 560억 달러에 달했지만 중형 3사(대한조선·케이조선·HJ중공업)는 21억 달러에 그쳤다.
이로 인해 중형 조선사들은 수주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HJ중공업은 지난해 5억5000만 달러의 수주 실적을 기록했는데 이는 2024년(8억8000만 달러) 대비 감소한 수치다. 이 회사 관계자는 "RG 부족에 따른 계약시점 조절이 지난해 수주 감소의 큰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현재 일부 중형 조선소 수주분 가운데 RG 부족으로 계약이 취소될 수 있는 물량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RG 발급을 담당하는 국책은행과 금융사들은 리스크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10여년전 조선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부실 조선소들이 속출하는 경험 등을 한 바 있어 중형사 보증에 보수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형 조선사에 대한 RG 발급이 그동안 워낙 많았고, 중형사의 경우 최근에서야 수주량이 늘다보니 일종의 '착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도 뒤따른다.
중형 조선사들은 과거와 환경이 달라졌다고 항변하고 있다. 구조조정을 거쳐 살아남은 3개사의 경우 최근 수년간 괄목할만한 이익 증가세를 보일 정도로 충분히 경쟁력을 갖췄다는 것이다. 특히 부산과 경남, 전남 등에 거점을 두고 있는 중형 조선사들에 대한 지원 확대는 이재명 정부가 역점을 두고 있는 '지역 균형 개발' 취지에도 부합한다는 평가다.
김찬 케이조선 대표는 "지금 조선사는 과거와 완전히 다른 구조인데 금융권은 여전히 옛날 기준으로 보고 있다"고 하소연했고, 유상철 HJ중공업 대표도 "금융기관이 RG 확대에 보수적 관점을 고수하면 중소형 선종을 중국에 내주는 꼴”이라고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