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는 완전히 깨끗하고 조용하며 냄새도 없고 진동도 없다. 충전소만 잘 갖춰지면 유용할 것."
롤스로이스 설립자 찰스 스튜어트 롤스의 이 말은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차를 설명하는 문장에 가깝다. 롤스로이스 스펙터는 그가 120여년 전 그렸던 전기차의 이상을 거의 그대로 현실로 끌어낸 모델이다.
이 중에서도 고성능 모델인 블랙 배지 스펙터는 '전기차'라는 단어보다 하나의 '작품'에 가까웠다. 가장 먼저 시선을 끈 건 외장 색상 '베이퍼 바이올렛'으로 검은색 위에 보랏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이 색상은 빛의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낮에는 묵직한 고급스러움이, 밤에는 네온사인을 연상시키는 강렬함이 드러났다. 1980~1990년대 클럽 문화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설명이 과장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블랙 배지'라는 이름처럼 판테온 그릴, 환희의 여신상, 더블 R 배지, 도어 핸들, 윈도 프레임까지 시야에 들어오는 거의 모든 포인트가 고광택 블랙으로 마감돼 있다. 단순히 색을 바꾼 것이 아니라 차 전체의 분위기를 완전히 재정의한 수준이다. 기존 롤스로이스가 '회장님 차'였다면 이 차는 확실히 '영 앤 리치(Young & Rich)'의 감각에 맞춰져 있다.
문을 열고 실내에 들어서는 순간 분위기는 또 한 번 바뀐다. 전통적인 아날로그 감성이 그대로 살아 있으면서도 시선이 닿는 곳마다 디지털 요소가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대시보드를 가득 채운 일루미네이티드 페시아에는 약 5500개의 '별'이 빛났고 그 위에는 인피니티 심볼이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냈다. 직관적인 버튼 위주의 조작계와 무선 애플 카플레이·안드로이드 오토 기능은 운전의 편의성을 높여줬다.
이 차량의 면모는 본격적인 주행에서 더 빛났다. 웬만한 대형 SUV(다목적스포츠차량)보다 길고 넓은 전장 5490㎜, 전폭 2015㎜라는 숫자는 운전자를 부담스럽게 할 만하지만 막상 주차장을 빠져나오는 순간 그런 생각은 사라진다. 스티어링을 살짝 돌리는 것만으로도 차체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차를 조작한다'기보다 '차와 함께 움직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차량이었다.
가속 페달에 발을 얹는 순간 전기차 특유의 지체 없는 토크가 그대로 전달되며 차체를 밀어냈다. 최고 출력 659PS, 최대 토크 109.6kg·m라는 수치는 숫자로 볼 때보다 체감이 훨씬 강하다. 특히 고속 구간에서의 안정감은 인상적이다. 시속 100㎞를 훌쩍 넘는 상황에서도 차체는 흔들림 없이 노면에 밀착됐다. 핸들링은 여전히 부드럽고 긴 차체라는 사실은 어느새 잊혀졌다.
여기에 '인피니티 모드'와 '스피리티드 모드'를 활성화하면 차의 성격은 한층 또렷해진다. 반응은 더 즉각적으로 변하고 가속은 한층 공격적으로 바뀐다. 조용하고 우아한 롤스로이스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달리는 전기 쿠페로 성격이 전환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이 차의 본질은 여전히 '안락함'에 있다. 저속 구간에서도 노면의 거침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방지턱을 넘는 순간에도 차체의 위아래 움직임이 최소화돼 있다. 고속에서도 승차감의 결이 변하지 않으며 저속과 고속의 경계를 흐려지게 했다. 풍절음 역시 극도로 억제돼 있어 차량 안에서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국내 인증 기준 공인 주행 가능 거리도 398㎞로 차량 성능을 고려하면 수준급이었다.
이처럼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는 차량이지만 현실적인 장벽은 분명하다. 시작 가격이 7억1900만원에 달해 일반적인 소비자에게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금액이다. 다만 최근 롤스로이스 구매 연령이 40대 초반까지 낮아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차는 분명 영앤리치들에게는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120년 전 전기차의 미래를 그렸던 한 창립자의 상상은 지금 이 차를 통해 현실이 됐다. 그리고 그 현실은 예상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훨씬 더 강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