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동해시 도심에서 차로 약 10분 떨어진 북평국가산업단지. 수십 년간 시멘트·금속 산업으로 대변됐던 '굴뚝 도시' 동해시의 경제를 뒷받침해 온 이곳에 전 세계 수소 산업 관계자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곳이 있다.
지난 3월 말 덴마크 녹색전환을 위한 민관협력 기관 '스테이트 오브 그린'과 덴마크 수전해 기술 기업 톱소 관계자들이 방문했고, 이 보다 앞서 최근 수년간 독일 수소 기술 기업, 불가리아 수소 협의체, 인도네시아 정부 대표단, 요르단 정부 관계자들, 유엔 CTCN(기후기술센터네트워크) 회원국 정부 관계자 그룹 등이 이 곳을 찾았다.
먼 이국땅의 전문가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은 건 이 산단에 들어선 그린수소 실증단지다. 한국동서발전(이하 동서발전)이 산단 내 유휴부지를 지난 2017년 매입해 2020년부터 그린수소 연구개발(R&D) 실증 장소로 사용하기 시작하며 국내 그린수소 연구의 핵심 장소가 됐다.
지난달 13일 '동해 그린수소 실증단지'라고 적힌 입구를 통과하자 거대한 태양광 발전 단지가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발전 시설 옆 '알칼라인 수전해장치 고안전성 확보 연구 실증센터' 구역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커다란 회색빛 컨테이너형 설비들이 줄지어 서 있다.
이곳은 태양광으로 만든 전력을 이용해 물(H₂O)을 분해해 수소(H₂)를 뽑아내는 과정의 안전성을 실증하는 장소다. 태양광 패널에서 생산된 전기가 직류(DC) 인버터 수배전반을 지나 정류기와 컨버터라는 관문을 통과한 뒤, 마침내 수소 생산의 핵심 설비인 '수전해 스택'을 지난다.
스택을 통과하며 갓 만들어진 수소는 마지막으로 수소 정제기와 산소 제거촉매 설비를 거친다. 물을 분해할 때 수소와 함께 발생하는 산소를 없애는 장치다. 수소에 섞인 수분을 건조하고 잔류 산소를 걸러내면 폭발 가능성이 원천 차단되면서 수소의 순도와 품질이 높아진다.
이 곳에선 2020년부터 약 4년간 진행한 '100킬로와트(kW) 알카라인 수전해 연구과제'를 마친 뒤 현재 기후에너지환경부(기후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의 정부 연구개발 과제 4건이 수행되고 있다. 올해 정부 과제 2개가 추가 선정돼 연구 범위가 더 넓어졌다. 수소 생태계의 난제들을 풀기 위한 과제가 대부분이다.
적은 전기로 효율을 높이는 수전해 시스템 개발, 폭발 위험을 차단하는 '방폭형 수소·산소 센서' 국산화 , 무겁고 부식되기 쉬운 쇠 배관 대신 안전하게 휘어지는 비금속 수소 배관 개발, 생산된 수소를 금속합금 등에 담아 안전하게 보관하는 '고효율 청정수소 저장 기술' 실증 등이 대표적이다.
아울러 이 곳에는 올해 말 기후부가 지원하고 동서발전이 주관하는 '수전해 기반 수소 생산기지' 구축도 이뤄진다. 2.5메가와트(MW) 규모의 이 생산시설이 가동되면 하루 1톤(연간 약 300톤)의 그린수소를 생산할 수 있다.
아울러 동서발전은 이 부지에 2029년 준공을 목표로 '그린수소 R&D센터'를 짓고 있다. 기술연구가 수소 산업의 뼈대를 세우는 인프라 구축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현장에서 만난 김주헌 동서발전 동해발전본부 그린수소사업부장은 "이 실증단지에서는 수소의 생산부터 저장, 안전, 활용에 이르는 밸류체인 전주기에 대한 테스트가 이뤄지고 있다"며 "국내에서 가장 폭넓은 그린수소 실증이 이뤄지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이 실증단지에서 최근 관심을 부쩍 얻고 있는 주제 중 하나는 버려지는 전기를 온전히 담아두기 위한 'P2G(Power to Gas)'다. 태양광이나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는 날씨에 따라 전기가 과잉 생산되면 전력망 보호를 위해 강제로 발전을 멈추는 '출력 제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데, 국내 재생에너지가 수년내 빠르게 늘어날 가능성이 높은만큼 이에 대비한 전력망 안정화 장치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다.
P2G는 버려질 위기에 처한 남는 전기로 물을 분해해 수소(가스) 형태로 변환해 저장해두고, 필요할 때 다시 전기로 꺼내 쓰는 방식이다. 기존 배터리에너지저장장치(ESS) 보다 에너지를 대용량으로 장기간 보관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지난 3월 말 덴마크 측과 연 포럼에서도 이 P2G가 핵심 주제로 다뤄졌다.
이 북평산단 그린수소 실증단지에서 두 블록 가량 떨어진 곳에는 또다른 수소 시설이 있다. 동서발전이 운영하는 4.2 MW 규모 연료전지 시설이다. 이 시설은 전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뜨거운 폐열을 바로 옆 북평레포츠센터 수영장에 공급한다.
이곳에 적용된 설비에는 800도 안팎의 고온에서 작동하는 'SOFC(고체산화물 연료전지)' 기술이 활용됐다. 동서발전은 도시가스를 개질해 얻은 수소로 전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300℃ 가량의 배기가스 폐열을 모은다. 그리고 열교환기를 거쳐 80℃의 따뜻한 온수 형태로 만들어 북평레포츠센터 수영장의 대형 온수 저장고로 공급한다.
시간당 480메가칼로리(Mcal)의 열을 공급해 2024년 한 해에만 수영장 측에서 약 1억4000만 원 이상의 도시가스 연료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버려지는 열을 재활용해 줄어든 이산화탄소(CO2) 배출량은 연간 약 770톤이다.
전통적 '굴뚝산업' 중심의 동해시 일대가 에너지 전환의 마지막 퍼즐 조각으로 꼽히는 그린수소 실험장으로 탈바꿈했다는 점은 이 공간의 상징성을 한층 키운다.
다만 실제 산업 현장에 안착하기까지는 또 다른 과제가 남아 있다. 여전히 높은 생산 단가 탓에 당장 본격적인 상용화는 쉽지 않지만, 향후 시장 확대에 대비해 다양한 활용 가능성을 열어두고 선제적으로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다.
김주헌 부장은 "수소를 대규모로 소비할 수 있는 산업 수요처가 안정적으로 작동해야 초기 생산 설비의 가동률도 확보할 수 있다"며 "정부의 정책적 마중물이 더해진다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수소 산업 생태계 전반의 경쟁력도 한층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