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노동조합의 총파업이 단순한 성과급 갈등을 넘어 스스로 경쟁력을 무너뜨리는 '자멸 리스크'로 번지고 있다. 특히 단기 생산 차질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고객 신뢰 훼손과 공급망 교란, 투자 지연 등 장기적인 후유증이다. AI(인공지능) 확산으로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가운데 국가별 패권 경쟁도 한창이라 노조의 자중지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송헌재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교수가 최근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삼성전자 노조의 파업이 현실화될 경우 추정되는 일일 손실 규모는 1조원에 달한다. 생산 차질 등으로 인한 영업이익 감소는 최대 10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노조측이 자체 추산한 생산 차질 규모만 해도 20~30조원 수준이다.
사실 업계가 더 걱정한 것은 숫자로 계산되는 생산 차질보다 △공급망 불안에 따른 대외 신뢰 훼손 △투자 지연으로 인한 기술 경쟁력 약화 △1750여개 협력사와 연결된 산업 생태계 충격 △반복적인 파업에 따른 국가 리스크 ·자본 비용 상승 등과 같은 구조적 후유증이다.
특히 AI 시대 들어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가격보다 '안정적인 공급'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삼성전자와 3~5년 규모의 LTA(장기공급계약)를 체결하고 있다. 공급 차질이 발생하는 순간 위약금과 배상 책임 논란이 불거질 수 있고 고객사는 즉각적으로 대체 공급처 확보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AMD·엔비디아 등 글로벌 고객사들은 공급망 회복탄력성을 핵심 평가 항목으로 보고 있다. 이미 일부 고객사는 파업에 따른 생산 차질 가능성을 삼성전자 측에 문의 중이다. 메모리 반도체(이하 메모리)는 일정 수준 이상의 성능만 확보되면 특정 브랜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제품군으로 분류된다. 결국 안정적인 물량 공급만 가능하다면 고객 이탈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업계에서는 단발성 생산 차질보다 '삼성 공급망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인식이 더 위험하다고 보고 있다. 삼성전자가 수십년 동안 구축해온 공급 안정성과 적기 생산 능력이 내부 갈등으로 흔들릴 수 있다는 얘기다. 단순한 매출 감소가 아니라 시장을 제손으로 내주는 '자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파업으로 생산 차질이 발생할 경우 불안감 때문에 고객사가 다른 기업을 선택할 가능성이 커진다"며 "파업으로 이미지에 상당한 손실이 발생할 경우 글로벌 1위 유지가 위태로울 수 있다"고 말했다.
AI 확산으로 HBM(고대역폭메모리)과 서버 D램 수요가 폭증하면서 메모리 산업은 과거와 다른 초호황가에 진입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만 내부 갈등으로 시간과 자원을 허비하고 있다는 평가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반도체 수출이 10% 감소하면 국내총생산(GDP)이 0.78% 줄어든다.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인 TSMC는 미국·일본·독일 공장 증설과 2나노 양산 로드맵을 동시에 추진하며 고객 확보에 나서고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HBM 중심의 공격적 증설과 장기 공급 계약 확대를 이어가는 중이다. 일본도 정부 주도로 메모리와 파운드리 양쪽에서 삼성전자 추격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시장에서는 이미 경고 신호가 나타나고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SK하이닉스보다 높은 영업이익과 영업이익률을 기록하고도 주가 상승률에서는 뒤처지는 모습이다. 두 달 전만 해도 SK하이닉스 시가총액은 삼성전자 시가총액의 약 60% 수준에 머물렀지만 지난 3월 말 노조의 협상 결렬 선언 이후 격차가 빠르게 좁혀졌다.
이날 기준 SK하이닉스 시가총액은 1416조원으로 삼성전자 시가총액(1663조원)의 85% 수준까지 올라왔다. 삼성전자보다 SK하이닉스 주가 상승세가 더 가팔랐다는 의미다. 시장이 AI 시대 핵심 경쟁력으로 단순 실적보다 공급 안정성 등을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한 셈이다.
업계에서는 지금 삼성전자에 필요한 것은 노사간 '승패'가 아니라 자멸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라고 보는 분위기다. 단기적인 생산 손실은 복구할 수 있지만 무너진 신뢰와 공급망은 되돌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 전문연구원도 "노사가 막판까지 진통이 있을 수 있지만 무슨 수를 쓰든 파업은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삼성전자가 자멸의 길로 갈 수 있는 상황이므로 노조가 전체적인 맥락과 방향을 고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