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경상북도 포항시 옛 도심인 남구 효자동 한 길목에 이르자 지금은 멈춰 선 철길 위에 '포항 철길숲'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옛 포항역을 오가던 동해남부선 구간이 10여 년 전 폐선된 후 남겨진 철길 쪽으로 걸음을 조금 옮기자 이내 아스팔트 열기를 무색하게 만드는 숲길이 끝없이 펼쳐진다. 이례적으로 무더운 5월 날씨를 기록했던 이날, 숲 안으로 발을 들이자 30℃에 육박하던 대기 온도가 한층 가라앉고 대기의 질 역시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한층 청량해졌다.
이날 오전 철길숲에서 만난 시민들의 표정에는 만족감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숲 인근에 거주하는 최희재씨(65)는 "하루에 한 번씩 꼭 이 길을 찾아 한 시간씩 운동 삼아 걷는다"며 "이사를 가고 싶어도 이 숲길이 주는 행복감과 쾌적함 때문에 떠날 수가 없다"고 했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나온 인근 주민 채수철씨(62) 역시 "안전하고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숲길이 집 앞에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른다"며 "아침, 저녁으로 매일 두번씩 거르지 않고 이곳을 찾는다"고 말했다.
주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이 철길숲은 포항시가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한 '그린웨이(Greenway) 프로젝트'의 중간 결과물이다.
포항은 1970년대 대한민국 근대화와 고도성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산업도시다. 포스코를 필두로 한 철강 산업을 중심으로 도시 역시 급속하게 팽창했다. 도시 성장의 기준은 속도였다. 외형적으로 부유한 도시가 됐지만 그 대가로 시민들의 정주여건은 점차 악화됐다. 공단에서 불어오는 미세먼지와 아스팔트가 머금은 열섬현상은 사는 곳으로서의 매력을 떨어뜨렸다.
이 사업을 담당하는 정성진 포항시 그린웨이추진과 그린웨이운영팀장은 그린웨이 프로젝트가 "단순히 나무를 심고 숲을 조성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도시의 체질 자체를 살고 싶은 매력이 있는 도시로 바꿔야 한다는 필요에서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포항이라는 도시의 패러다임을 자동차 중심에서 사람과 보행 중심으로 완전히 개편하려는 고민이 있었다"며 "마침 2015년 도심을 관통하던 철도가 폐선되고 KTX 역이 시 외곽으로 이전하며 대규모 유휴 부지가 생겼고, 이 부지를 숲길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다"고 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며 포항시는 경주와의 경계 부근에서 시작해 도심 북쪽까지 이어지는 9.3km 길이 선형(線形) 폐선 부지를 푸른 숲길로 리모델링했다. 단순히 나무를 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도시 전체의 혈관을 녹색으로 바꾸는 방대한 도시계획의 시작이다.
포항 철길숲이 가져온 변화는 수치로 명확히 나타난다. 국립산림과학원 등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숲 내부 온도는 숲 바깥의 주변 지역보다 적게는 3℃에서 많게는 7℃까지 낮아진다. 나무들이 뿜어내는 수분 덕에 천연 습도 조절이 이뤄지고 미세먼지 협착 효과까지 더해지면서, 시민들은 그 어떤 통계 지표보다 몸으로 직접 환경적 편익을 체감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포항시는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의제를 지방자치단체의 실질적 수익 모델로 연결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기후에너지환경부의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 외부사업'에 도시숲 분야로 총 6건을 등록한 것이다. 단일 기초 지자체로는 전국 최다다. 이 숲의 연간 흡수량은 약 94톤 규모로, 최대 45년까지 인증을 갱신하면 약 4000톤 이상의 탄소 배출권을 확보할 수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기후대응을 위해 조성한 숲이 침체되었던 원도심의 경제 체질까지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는 점이다. 현재 약 10km에 달하는 철길 숲을 걷는 시민은 매일 약 3만 명에 육박한다. 포항시 전체 인구의 약 6%다.
일부러 시간을 내 찾는 공간이 아니라 시민들의 출퇴근 길이란 게 이 숲길의 위력을 배가시킨다. 가장 붐비는 시간이 오후 6시 이후 퇴근 시간인 이유도 일터에서 집까지 이동하는 인구가 많은 영향이다.
사람이 오고 가자 돈이 돌기 시작했다. 포항시가 빅데이터 카드 매출액을 기준으로 분석한 결과 2022년 길 주변 상권의 연간 매출액은 4300억 원을 넘어섰다. 철길숲 조성 전 사실상 제로(0)였던 소비가 새로 창출됐다. 포항시가 철길숲 조성에 투자한 총공사비가 430억 원임을 감안하면 매년 투자비의 10배가 넘는 소비 유발 효과가 골목상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과거 기차가 달릴 때만 해도 철길 주변은 소음과 분진으로 몸살을 겪는 기피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철길은 도시를 공간적으로 분절했다. 건물들은 모두 철길을 등진 채 반대편으로 출입구를 냈다.
하지만 철길이 숲으로 변하자 이 곳을 매일 도보로 이동하는 인구가 급증했고 건물들도 일제히 숲을 향해 문을 열기 시작했다. 지난해 말 기준 철길숲 주변에 신축된 건물은 총 196개로, 이 중 65%가 카페나 음식점 같은 상업용 시설이다. 상권이 계속 커지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포항시의 청사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시는 2030년까지 기존의 선형 철길숲을 포항시 전체를 타원형으로 감싸 안는 '루프(Loop)형 순환 녹지축'으로 확장할 계획이다.
핵심은 물길과 숲길의 융합이다. 포항시는 지난해 12월 과거 콘크리트로 복개해 도로로 쓰던 학산천을 생태하천으로 복원했다. 이 학산천을 시작으로 도심 내 4대 주요 복개 하천을 모두 복원할 예정이다. 하천이 열리고 철길숲과 연결되면 도시 내부에는 거대한 물길과 숲길의 순환 고리가 완성된다.
이 구상이 실현되면 포항 시민들은 도심 어느 곳에 살든 '걸어서 5분 이내'에 크고 작은 공원이나 하천을 만날 수 있게 된다. 특히 원도심에 밀집한 노후 주택가에 거주하는 고령층과 저소득층 주민들도 자전거나 도보로 도시 전역을 이동할 수 있다.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동시에 한층 더 쾌적한 정주환경이 가능해진다.
포항시의 이러한 기후변화 대응과 도시전환 노력은 국제사회에서도 인정받았다. 내년 지속가능한 지역 발전을 추구하는 전세계 지자체 네트워크 '이클레이(ICLEI) 세계총회'도 포항에서 열린다.
포항 철길숲이 처음부터 환영 받았던 것은 아니다. 2015년 폐선 직후 철길 주변 주민들의 반발은 거셌다. 지난 100년간 소음과 분진 피해를 입으며 재산권 행사에 제약을 받았던 주민들은 숲 대신 주차장이나 도로 조성, 혹은 개발 규제 완화를 요구했다. 수십만명 시민의 이해관계가 촘촘히 얽혀 여론을 하나로 모으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이때 포항시가 선택한 것은 '속도전'이 아닌 '경청'이었다. 시는 착공을 서두르는 대신 대략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끊임없이 주민 설명회를 열고 소통했다. 주민들의 목소리를 설계에 반영하고, 공원이 생겼을 때 주민들이 얻을 실질적 이익과 삶의 질 향상을 세부적으로 설명했다. 전문가들을 초청한 강연도 진행했다. 공식적인 회의·강연만 70회 이상이다.
철길숲이 완성되자 '숲이 왜 필요하냐'던 목소리는 사라졌다. 이제는 오히려 각 동네마다 '우리 지역에도 철길숲 같은 공간을 만들어달라'는 청원이 줄을 잇는다. 효용성을 눈으로 보고 삶으로 체감했기 때문이다.
포항시의 사례는 도시의 변화가 시민의 삶의 질을 끌어 올리는 방향을 향하고, 변화의 방식이 정책 당국과 시민간 충분한 소통의 토대 위에서 이뤄질 때 처음 예상한 것 보다 훨씬 큰 편익으로 돌아온다는 걸 현실에서 보여준다.
정성진 팀장은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주민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이행이 제대로 될 수 없다"며 "빨리 진행하는 것보다, 더디고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시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모으는 선행 과정이 충분히 있을 때 오히려 결과적으로 더 신속하고 부작용 없이 사업이 진행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