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지난 3일(현지시간) 공개한 '유럽 기술주권 패키지'는 유럽의 경제안보가 구체적인 정책으로 진화하는 단면을 보여준다. EU 집행위원회는 이 패키지를 구성하는 세부항목으로 △반도체법 2.0 △클라우드 및 인공지능 개발법(CADA) △EU 오픈소스 전략 △에너지 분야 디지털화 및 인공지능 전략 로드맵을 각각 발표했다.
이 중 반도체법2.0 제안은 단순한 공장 유치를 넘어 설계·생산·수요까지 반도체 가치사슬을 유럽 안에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EU는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유럽의 점유율을 2030년까지 20%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 아래 2023년 반도체법을 발효했다. EU 집행위원회(이하 위원회)는 이 법을 통해 520억 유로 이상의 공공·민간 투자가 약속됐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위원회는 "EU는 전 세계 반도체의 10% 미만을 생산하며, AI(인공지능) 칩을 포함해 5나노미터 미만의 최첨단 칩을 미국과 아시아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전제한 뒤 "이러한 구조적 의존은 자동차와 에너지에서 항공우주 및 방위에 이르기까지 EU 핵심 산업에 영향을 미치는 공급 차질과 강압적 압력, 시스템적 충격의 위험을 높인다"며 개정 필요성을 밝혔다.
또 대형 제조시설 유치에 집중하더라도 이를 구매할 첨단 수요처가 유럽 안에 충분하지 않으면 생태계가 뿌리내리기 어렵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수요 확보 조치 도입도 중요하다. 위원회는 "초기 반도체법은 주로 공급 주도적이었지만 반도체법 2.0은 수요 측 조치에 더 큰 강조점을 둔다"며 "현지 수요를 육성하는 것은 현지 반도체 공급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반도체법 2.0은 유럽 내 AI·클라우드 인프라 확충을 겨냥한 클라우드 및 AI 개발법과 정합성이 높다. EU는 유럽 내부에 AI 데이터센터를 늘려 첨단 반도체 수요를 키우고, 이를 반도체 설계·생산 역량 강화와 연결하겠다는 구상이다. 이같은 EU 내 반도체 산업 경쟁력 제고를 달성하기 위해 2035년까지 1200억 유로 규모의 공공·민간 투자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
위원회는 "EU가 외국 반도체 공급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면서, 공급망 의존의 잠재적 '무기화'를 포함한 외부 강압에 더 취약해지고 있다"며 "반도체 설계와 제조에서 견고한 산업 기반이 없으면 EU의 연구 및 혁신 생태계를 생산성 향상과 신기술의 대규모 산업화로 전환하는데 실패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반도체법은 EU의 전략적 자율성, 경제안보 및 경쟁력 의제와 일관성이 있다"며 "이는 유럽 경제안보 전략, 이중용도 수출통제, 외국보조금 규정 및 유럽전략기술플랫폼(STEP)과 일관성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수단들은 함께 전략적 의존을 줄이고 산업 역량을 강화하며 단일시장에서 외국 보조금으로 야기되는 왜곡을 해결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