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배 명품전략' 통했다…아모레퍼시픽, 글로벌 '톱10' 눈앞

송지유 기자
2017.03.17 04:45

[CEO 취임 20년]아버지 뜻따라 '화장품 한우물'…브랜드 중심으로 체질개선, 해외사업 공략도 가속화

"경배야, 화장품에 승부를 걸어야 한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을 할꺼다." 1992년 폐암수술을 받고 병상에 누워 있던 서성환 태평양(현아모레퍼시픽) 회장은 차남인 서경배 기획조정실 사장의 손을 붙잡고 수차례 당부했다. 1945년 회사 창립 이후 줄곧 국내 화장품 업계 1위 자리를 지켜왔던 태평양이지만 당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수입 화장품 개방으로 시장 점유율이 급락한 데다 노조파업까지 겹쳐 부도 위기까지 몰렸다.

재계의 사업다각화 열풍에 편승해 금융, 전자, 패션, 스포츠 등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벌인 것도 문제였다. 서 사장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과감한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태평양증권을 시작으로 생명보험, 프로야구단, 정보기술, 금속, 잉크 등 계열사를 잇따라 매각했다. 구조조정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1997년말 IMF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대기업들이 줄줄이 쓰러졌지만 태평양은 한발 앞서 구조조정을 단행한 덕분에 살아 남았다.

아버지의 뒤를 이은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의 '글로벌 화장품 기업' 꿈이 결실을 맺고 있다. 중국 등 해외 소비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해외매출 비중이 전체의 25%를 넘어서는 등 수직 상승하고 있는 것.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 명품 브랜드를 만들자'는 CEO(최고경영자)의 20년 경영철학이 빛을 발하고 있다는 평가다.

◇'화장품 한우물' 집중…'브랜드 컴퍼니'로 체질개선=서 회장은 CEO 취임 전후 화장품과 관계없는 사업부터 정리하는데 역량을 집중했다. 태평양돌핀스는 현대그룹에, 태평양농구단은 신세계에 팔았다. 자본잠식 상태였던 태평양패션은 '왜 돈을 받고 팔 생각만 하냐'며 오히려 거평그룹에 150억원을 얹어주고 회사를 넘기는 국내 최초 마이너스 M&A(인수·합병) 기록을 썼다.

화장품 사업으로 방향을 잡은 뒤에는 브랜드 컴퍼니로 전환에 속도를 냈다. 30개 넘는 브랜드의 가치와 손익, 이미지를 분석한 결과 타깃 고객층이 겹쳐 마케팅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라고 결론 내린 것이다. 브랜드 파워를 조사해 존재감이 약한 브랜드는 시장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하는 대신 설화수·아모레퍼시픽·헤라·라네즈 등 인지도가 높은 10개 브랜드에 마케팅 자금을 집중하는 전략을 폈다. 유통 채널별로 브랜드를 묶어 관리하는 '채널 매니저' 시스템도 도입했다.

수입화장품이 장악한 백화점 매장에도 변신을 꾀했다. 당시 크리스찬디올·에스티로더·랑콤 등 수입 브랜드는 예쁜 파우치에 앙증맞은 샘플을 담아 고객 사은품으로 줄 때 태평양은 포장조차 하지 않은 커다란 냄비를 나눠줬다. 백화점 한 매장에서 리리코스·마몽드·순정진 등 여러 브랜드 제품을 판매해 늘 번잡스러웠다. 수입 화장품과는 브랜드 이미지도, 고객 타깃층도 완전히 달랐다.

서 회장은 디자인·자금·영업 등 관련 부서 직원들에 직접 연락해 "백화점 영업부터 바로 잡자"고 당부했다. 브랜드별로 독립매장을 꾸리고 화장품 케이스와 사은품 디자인을 전면 리뉴얼했다. 설화수 샘플을 써 본 고객들이 재구매에 나서면서 만년 적자였던 백화점사업부는 매년 두자릿 수 성장을 지속했다. 서 회장이 CEO로 취임한 지 5년만인 2002년에는 수입 브랜드를 제치고 백화점 화장품 매출 1위로 자리잡았다.

◇"해외사업, 선택 아닌 필수"…철저한 현지화 전략=사양산업으로 분류되던 화장품 사업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내수시장을 벗어나 해외로 나가야 했다. 한국과 가깝고 큰 시장인 중국을 해외진출 발판으로 만들기로 했다. 서 회장은 1999년 중국 상하이에 조직을 만들고 철저한 현지 시장조사에 돌입했다. 1990년대초 프랑스와 중국에 법인을 세우고 무작정 해외사업에 나섰다가 수십억원 손실만 본 채 눈물을 흘리며 사업을 철수해야 했던 뼈아픈 실패 경험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중국에서 사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현지 소비자 수천여명의 피부 특성과 화장품 소비 성향 등을 분석했다. 현재 설화수와 라네즈, 이니스프리 등 8개 브랜드 매장 약 4000개를 운영중이다. 대표 브랜드 설화수의 경우 중국 시장에 진출하려고 인허가 기준에 맞춰 처방을 4번이나 바꿨다. 상하이에 대지면적 9만2787㎡, 건축면적 4만1001㎡ 규모 생산시설을 건립해 일부 제품을 현지 생산하고 있다. 현지 직원수는 7700여명(간접고용 포함)에 달한다. 법인장을 비롯한 영업·생산 등 직원 대부분이 현지인이다.

최근에는 대 챔피언 브랜드(설화수·라네즈·마몽드·이니스프리·에뛰드)를 앞세워 중국 뿐 아니라 아세안, 미국, 캐나다, 유럽, 중동으로 보폭을 넓히고 있다. 중국 매출이 1조원을 돌파하며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지만 중화권에 90% 이상 집중된 해외 매출 구조를 다변화하기 위해서다.

◇과감한 R&D 투자, 뚝심경영…'글로벌 톱10' 뷰티기업 진입=R&D(연구개발)와 시설에 돈을 아끼지 않는 서 회장의 과감한 투자는 글로벌 뷰티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밑거름이 됐다. 프랑스나 미국 화장품을 모방하지 않고 아모레퍼시픽이 독자 개발한 '에어쿠션'은 세계 화장품 시장 역사를 새로 썼다.

특수 스펀지 재질에 선크림, 메이크업베이스, 파운데이션 등 기초 메이크업 제품을 담아 편의성을 높였는데 랑콤, 에스티로더 등 글로벌 브랜드들이 모방 제품을 만들어 판매할 정도로 전 세계 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워터슬리핑팩' 등도 글로벌 히트상품이 됐다. 편의성을 중시하는 중국 여성을 겨냥해 씻어낼 필요 없이 바르고 자도록 한 제품을 만들었는데 다양한 국가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전 세계 여성들 핸드백에 아모레퍼시픽 립스틱을 담겠다"는 서 회장의 명품전략은 해외 무대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듣보' 한국 화장품 기업이 글로벌 10위권의 주요 기업으로 자리잡는 초석이 됐다. 매년 세계 뷰티기업 매출 순위를 발표하는 미국 패션·뷰티 전문매체 WWD(Women’s Wear Daily)에 따르면 아모레퍼시픽그룹은 지난 2015년 세계 12위에 올랐다. 업계는 글로벌 경기가 불황이던 지난해에도 아모레퍼시픽그룹은 30% 가까운 매출 성장을 한 만큼 국내 업체 최초로 10위권 진입이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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