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사가 대법원 판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느라 소멸시효가 지나버린 만큼 소멸시효에 관계없이 자살보험금을 다 지급해야 한다. 특히 빅3 생명보험사는 미지급 자살보험금 규모가 1000억~1600억원 수준으로 큰 만큼 최소한 일부 영업정지 이상의 중징계가 불가피하다.” 대법원 판결을 이유로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을 전액 지급하지 않고 있는 빅3 생보사에 대한 금융감독원 고위 당국자의 입장이다.
이같은 금감원의 중징계 논리는 5가지 문제점을 갖고 있다. 첫째, 생보사가 자살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고 미룬데 금감원 책임도 작지 않다. 금감원이 만든 생명보험 표준약관에 자살시 일반사망보험금과 재해사망보험금 중 무엇을 지급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해사망시 일반사망보다 보험금을 2~3배 더 많이 지급하는 재해사망 특약 종신보험은 2001년에 처음 나왔다. 당시 종신보험 등 생명보험 표준약관은 보험 가입 2년이 지났으면 자살해도 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생보사들이 재해사망 특약에도 이 표준약관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자살시에도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약관상 오류가 생겼다.
금감원은 재해사망은 생명보험이 아니라 사고시 사망보험금을 지급하는 상해보험 등 제3보험의 표준약관을 따라야 한다고 지적한다. 생명보험 표준약관에 따라 재해사망 특약 약관을 만든 생보사들이 잘못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생보업계는 재해사망 특약이 들어간 종신보험도 생명보험이니 생명보험 약관을 따른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 2001년부터 금감원에 생명보험 표준약관에 자살시 보험금 지급 기준을 명확히 해달라고 요구해왔다고 반박한다. 금감원은 자살이 재해가 아니라며 생보업계 요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2010년이 돼서야 생명보험 표준약관을 수정했다.
둘째, 소멸시효가 지난 보험금을 다 지급하라는 금감원 주장은 법 논리에 맞지 않는다. 금감원이 제재의 근거로 삼는 기초서류(약관) 준수 의무는 2011년에 보험업법에 포함됐다. 대법원이 소멸시효가 지난 자살보험금은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결했음에도 2011년 이후 미지급 자살보험금은 보험업법으로 제재가 가능하다. 하지만 2011년 이전 미지급 자살보험금에 대해선 제재할 법적 근거가 없다.
셋째, 금감원이 미지급 자살보험금 규모가 크다고 빅3 생보사를 중징계한다면 몸집이 큰 회사는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항상 더 큰 벌을 받아야 한다. 굳이 미지급 보험금 규모를 따져 제재를 해야 한다면 각 보험사별로 전체 보험금 지급 규모 대비 미지급 보험금의 비율을 기준으로 삼는게 더 합당하다.
넷째, 똑같이 보험업법을 어긴 다른 생보사와 형평성이 어긋난다. 금감원은 똑같이 보험업법을 위반했는데도 중징계 압박에 두 손 들고 자살보험금 전액 지급을 결정한 보험사에는 수백만원의 과징금만 부과하고 전액 지급을 하지 않고 있는 보험사에는 최소 일부 영업정지 이상의 중징계를 내린다는 방침이다. 금감원 지시를 잘 따랐을 때 제재 수위를 경감해줄 수 있다 해도 제재 차이가 너무 크다.
다섯째, 제재 대상에 일관성이 없다. 금감원이 빅3 생보사에 통보한 징계 예고 대상에는 문제가 된 약관을 만든 상품 담당자들은 다 빠지고 보험금 지급 담당자들만 포함됐다. 금감원은 “문제가 된 약관이 나온지 15년 가량 지나 당시 상품 담당자가 현직에 없는 경우가 많고 현직에 있더라도 결정권자가 아니라 제외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결정권자가 아닌 보험금 지급 담당자는 왜 징계 대상에 넣었을까. 약관 오류를 문제 삼아 상품 담당자까지 징계할 경우 업계 요구를 무시하고 10년간 표준약관을 손대지 않았던 금감원 책임까지 함께 부각될까 우려한 것은 아닐까.
자살보험금 전액 지급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삼성생명, 한화생명은 상장사고 교보생명은 전체 지분의 50%가량을 여러 외국인 주주가 보유하고 있다. 대법원 판결과 상반되게 소멸시효가 지난 보험금까지 다 지급해야 한다고 주주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 전액 지급을 결정한 생보사들은 주주가 단일, 혹은 2~3곳으로 구성돼 있어 주주 설득이 상대적으로 쉽다.
금감원이 이런 사정을 무시하고 중징계를 감행한다면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바람직하지 않은 교훈만 금융권에 던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