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최대 구속자를 양산한 단일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단언컨대 1986년 10월 건대 사태와 1996년 8월 연대 사태를 넘어설 만한 사건은 없다. 전두환정권 시절 발생한 건대 사태는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이 주도한 사건으로 총 연행자 1525명, 구속자 1295명의 범죄자를 양산했다. 김영삼정권 아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등이 매년 8월이면 벌인 범민족대회로 촉발된 연대 사태는 총 5848명이 연행돼 462명이 구속된 사건이다. 서울 시내에서 어느날 갑자기 1000명 넘게 구속되면 어떻게 되는지 나는 가늠하지 못하겠다. 서울 관내 경찰서가 20개 남짓이고 그 유치장의 적정 인원은 수십 명에 불과할 텐데 그 '폭도들'을 도대체 어떻게 가뒀을지 궁금하다.
이 두 사건은 학생운동 역사에서도 징후적인 것이었는데 건대 사태가 이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와 한총련의 학생운동 10년의 전성기를 연 사건이라면 연대 사태는 그 장렬한 최후의 마침표와 같은 것이 됐다.
연대 사태 다음 해 입학한 학교는 싸늘하고 스산한 기운이 여전했다. 학생들이 끝까지 저항한 종합관은 시위 당시 상태 그대로 방치돼 화염병과 최루탄의 흔적이 남아 검게 그을려 있었고 1년이 넘도록 학생들 출입이 금지됐다.
단순히 풍경만 을씨년스러웠던 것이 아니다. 한총련 집회가 열릴 조짐이 보이면 경찰은 학교 정문을 가로막고 타 학교 학생들의 출입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신분증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범민족대회가 열릴 즈음인 8월뿐만 아니라 3월 등록금 투쟁이나 5월 노동절 집회, 10월 노동자대회에 이르기까지 연중 시위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재학생들은 학교를 출입하려면 학생증을 제시하고 본교 학생임을 스스로 입증해야만 했다. 나 역시 얌전히 수업을 들으러 갈 때도 무차별적인 불심검문을 당했고 학생증을 두고 온 날이면 경찰에게 구구절절 사연을 설명하며 제발 출입을 허락해달라는 비굴한 눈빛을 보내곤 했다.
상시적인 불심검문의 시대였다. 그리고 그 불심검문은 명백히 불법이었다. 경찰관은 경찰관직무집행법 제4조 제1항에 따라 '수상한 행동이나 그 밖의 주위 사정을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볼 때 어떠한 죄를 범하였거나 범하려 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거나 '이미 행하여진 범죄나 행하여지려고 하는 범죄행위에 관한 사실을 안다고 인정'될 때만 불심검문을 제한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심검문 당시 '자신의 신분을 표시하는 증표를 제시하면서 소속과 성명을 밝'히는 것이 법률상 선행돼야 함에도 이를 행하는 경찰관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몇몇 선후배와 함께 경찰관직무집행법의 존재를 확인한 후 소극적인 거부운동을 벌인 기억이 난다.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학생증을 요구하는 경찰관에게 신분증을 먼저 제시해달라거나 소속과 성명을 밝히라고 요구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었다. 왜 이런 대규모 불심검문이 필요한지, 그것이 경찰관직무집행법의 범위에 있는 것인지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할 수는 없었다.
경찰과 검찰은 형사소송법상 강제수사의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비슷한 지위를 갖지만 그 물리적인 강제력의 동원 수준에서 차이가 크게 나는 권력기관이다. 2200명 정도의 검사와 6200명 남짓의 검찰 수사관을 합해도 1만명이 되지 않는 검찰은 14만명에 육박하는 경찰과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다.
한때 경찰국가였던 한국에서 경찰권은 그 힘이 너무 강해서 문제였던 적이 더 많다. 경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필요한 이유다. 경찰관의 직무집행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 및 모든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사회공공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 직무수행에 필요한 최소한도에서 행사되어야' 한다.(경찰관직무집행법 제1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