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 주인공 윤희중과 그의 외도 상대인 하인숙은 지루한 화투판 술자리에서 처음 만난다. 성악을 전공한 하인숙이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목포의 눈물'을 권태롭게 부르는 장면은 하인숙의 이상과 현실 간 괴리를 나타내준다. 이미 유행가가 아닌 '목포의 눈물'은 "책임도 무책임도 없"는, 노래와 함께 희망마저 가물거리는 안개 낀 무진을 상징한다. 반면 그녀가 그리워하는 오페라 '나비 부인'의 아리아 '어떤 갠 날'은 안개가 걷힌 선명한 세계에 대한 희망이다. 안개로 상징되는 불명료한 추상성을 떠나 명료한 합리성으로 가고 싶은 하인숙의 내밀한 욕망은 노래를 통해, 확실성의 세계인 서울에서 온 윤희중에의 이끌림을 통해 현실로 흘러넘친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불확실을 두려워한다. 하여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본능이 현대문명을 이룩했다. 근대적 이성의 빛이 도래하기 이전의 세계는 암흑으로 가득했다. 야만과 무지, 주술과 운명론의 어둠에 의해 인간 실존이 아예 드러나지 않던 그 공허하고 무의미한 시간들을 서양철학은 밤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선사시대부터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무의미를 견디려 한 호모 콰렌스(Homo Quærens)는 결국 서구의 합리적 이성을 꽃피웠고, 19세기의 근대성은 태초부터 중세까지 지속되던 미지의 어둠을 환하게 밝히는 데 성공했다. 명료한 지성으로 모든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서양의 정신사를 '대낮의 철학'이라 부른다. 오늘날 인류 문명은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는" '안개'에서부터 '어떤 갠 날'까지 나아 온 빛의 역사인 셈이다.
그런데 이성이라는 절대정신이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역사라고 한 헤겔은 정작 의미의 낮보다 무의미의 밤에 주목했다. 여기서 헤겔이 주목한 밤은 이성이 도래하기 이전의 암흑 상태가 아니라 근대성의 빛이 미처 비추지 못한, 닿을 수 없는 의식 너머의 광대한 세계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헤겔적 의미에서의 밤은 무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근대의 과학기술로도 여전히 개척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들이라고도 할 수 있고, 대낮의 환한 빛이 만든 그늘에서 자라나는 돌연변이의 공포일 수도 있다. 헤겔에게 있어서 '세계의 밤'이란 무지와 야만, 공허하고 무력한 무화나 패배가 아니라 기존하는 모든 것들의 의미를 혼돈에 빠트릴 압도적인 내핵의 힘이자 이제껏 세상에 존재한 적 없는 것들의 출현을 앞둔 무대 뒤의 장막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불확실을 너무 두려워 한 나머지 100퍼센트의 분명한 확률이 아니고서는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는다. 도전이라는 게 꼭 거창한 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를 공부하는 것도, 사상에 관심을 갖는 것도, 더 작게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도, 안 먹어본 음식을 먹는 것도 다 도전이다. 하지만 불확실에 대한 걱정으로 망설인다. 망설이고 주저하면서 유튜브를 본다. 오은영 박사나 김창옥 씨의 강연을 들으며 스스로 해야 할 고민을 타인에게 위탁한다. 책과 영화 리뷰, 음식점 탐방기를 보면서 남이 먼저 경험한 것이라야만 그제야 받아들인다.
하지만 모든 눈부신 문명은 어둠에서부터 탄생했다. 인간의 위대함은 불확실의 두려움에 떨면서도 캄캄한 허공으로 힘차게 발을 내딛은 도약에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불확실에 몸을 던지지 않고 어떻게 사랑할 수 있나? 비록 실패하더라도 한 사람을 위해 모든 걸 다 바칠 수 있는 그 열정이야말로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축복이다. 사랑은 끝내 아픔을 안겨 주지만, 사랑 없는 편안함에 비하면 그 고통은 훨씬 가치 있는 것이다. 사랑해보지 않고 백 년을 사느니 뜨겁게 사랑하고 요절하는 게 낫다. 확실한 건 안전하지만 재미없다. 안 그래도 지루한 인생, 나는 불확실한 것들로 자꾸 기울어지는 중이다. 낮보다 밤이 긴 이 겨울, 노래 한 곡 부르고 싶다.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