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살고 있다. 지난 주말 저녁 식당 옆 테이블에 앉은 젊은 남성이 일행에게 "엄청 죽었네. 이태원은 얼마 안 죽었잖아" "나는 절대 안 죽을 자신 있어. 고개 숙이고 안전벨트 딱 붙잡고 응?" 큰소리로 떠들었다. 온라인엔 항공전문가가 넘쳐난다. 주워들은 철새도래지, 활주로 길이, 항공기 구조, 정치적 음모론까지 운운하며 아는 척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참사 속보에 달린 댓글에는 'ㅋㅋㅋ'를 남발하는 조롱도 있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한 크리스천의 블로그엔 북한 지령의 테러라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가득하고 어느 커뮤니티에는 내 또래거나 30대 중반 부모들이, 자식 키우는 사람들이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때 그랬듯 "놀러 갔다 오다 죽은 사람들인데 왜 국가애도기간을 정하는지" "왜 합동분향소를 만드는지" "그런 데 왜 내 세금이 들어가는지"를 따졌다.
한나 아렌트는 '생각 없음의 죄'가 가장 최악의 악이라고 말한다. '악의 평범성'은 한나 아렌트가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기록한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개념이다. 아이히만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장교로 홀로코스트(대량학살)의 실무책임자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법정에 선 그가 지극히 평범하고 왜소한 한 중년남성이라는 데 충격을 받았다. 악은 악마의 얼굴이 아니라 평범한 모습으로 온다는 것이 '악의 평범성'의 표층적 함의라면 그 심층은 보다 복잡하다. 아이히만은 대량학살에 그 어떤 고민이나 반성, 죄의식도 갖고 있지 않았다. '악'이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반성적으로 성찰하지 않을 때,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해질 때, 분노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을 때, 타인의 비극마저 정치적 어젠다로 이용할 때 우리는 악마가 될 수 있다. 이산하 시인은 시집 '악의 평범성'(2021년)에서 악은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약자를 추방시키는 국민청원에 수십만 명이 달려들 때'('지난번처럼') '4.3을 기억하는 일이 금기였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불온시'('새로운 유배지')될 때 우리는 모두 아이히만이 된다. 참사의 희생자들을 조롱하는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고 환호한 사람들은/ 모두 한 번쯤 내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악의 평범성 1')이다.
관심받고 싶고 아는 척하고 싶고 대단히 냉철하고 합리적인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불온하고 패륜적인 말을 함부로 내뱉는 사람들이, 그런 역겨운 생각을 감히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더라도 그걸 말과 글로 옮길 수 있는 사람들이, 말과 글로 배설하면서 주저함과 망설임이 없는 사람들이, 댓글을 쓰고 나서 잠시 후 삭제하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살고 있다. 너무 많은 악이, 너무 평범한 악이 우리와 같이 살고 있다. 그들을 시민, 이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쓰레기들이라고 윽박지르고 싶지만 지금은 그런 분노도 필요 없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필요 없고, 정치도 필요 없고, 서두른 진상규명도 필요 없는 때다. 그저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참여하며 가만히 애도할 때다.
그렇지만 그 애도를 강요하지 않아야 할 때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분향소로 달려가고, 누군가는 일상의 자리에서 짧은 묵념을 하고, 또 누군가는 아주 잠깐 자기 내부에서 무언가 깨지는 듯한 파열을 경험하고, 또 누군가는 큰 감정적 동요 없이 좀 처진 기분으로 하루를 산다. 애도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고 감정에는 무수한 결이 있다. 유형의 추모가 있으면 무형의 추모도 있고, 마음이 무너진 채 애써 평온하고 즐거워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도 다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안다.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낸 분들에게 위로와 용기가 있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