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1월28일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됐다. 이는 열 번째 발사였고 이 프로젝트의 주목적은 미국의 1세대 통신위성의 궤도투입, 핼리혜성 관측, 그리고 우주에서 원격으로 학교 강의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과학교사인 매콜리프가 선발돼 탑승했다. 그러나 발사 73초 만에 폭발했다. 6명의 우주비행사와 교사였던 탑승자 7명이 모두 사망했다. 이 발사장면은 전 세계에 TV로 생중계됐다.
당초 챌린저호의 발사 예정일은 1월22일이었다. 그러나 일정이 계속 미뤄졌다. 23일에서 24일로, 25일로, 27일로 미뤄졌다. 결국 28일로 발사가 미뤄졌다. 그러나 28일엔 날씨가 너무 추웠다. 전문가들은 발사연기를 주장했지만 NASA(항공우주국)는 발사를 강행했다. 그리고 73초 만에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1월29일 챌린저호 폭발사고 원인조사와 재발방지 조치를 위한 위원회가 꾸려졌다. 위원장은 국무장관 윌리엄 P 로저스, 위원회 이름은 로저스위원회(Rogers Commission)였다. 위원들은 닐 암스트롱(아폴로11호의 사령관, 첫 번째 달 착륙 우주인), 리처드 파인만(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샐리 라이드(미국 최초 여성 우주비행사)와 공군 소장, MIT(매사추세츠공과대) 교수, 스탠퍼드대 교수, 항공우주 미디어 편집장 등 모두 10명이었다. 위원들은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지만 NASA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되 지나치게 강한 비판은 삼갔다. NASA의 명성이 실추되는 것을 우려해서다.
하지만 파인만의 보고서는 사고의 기술적 원인(O-링의 결함)과 NASA의 조직적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는 위원회 보고서 초안이 지나치게 모호하고 정치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분석과 결론이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위원회와 직접 논쟁을 벌였다. 특히 위원회의 주요 결론이 기술적 원인(O-링 문제)과 NASA의 문화적 문제를 과소평가한다는 점에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그의 보고서는 부록F(Appendix F)로 첨부됐고 '우주왕복선의 신뢰성에 관한 개인적 견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이 보고서엔 파인만의 독자적 견해와 실험적 분석이 포함됐고 여기에서 그는 기술적 문제와 NASA의 조직적 문제를 분명히 지적했다.
파인만은 보고서 서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주선과 승무원이 사고로 생명을 잃을 확률에 대해 현장 기술자들과 관리자들의 견해차가 너무 크다. 현장 기술자들의 주장은 100분의1, 관리자들의 주장은 10만분의1이다. 10만이라는 값은 우주왕복선을 300년 동안 매일 운항했을 때 단 한 번의 사고만 난다는 의미다. 관리자들이 이렇게 낙관적으로 본 이유는 무엇인가.
보고서 채택과정에서 그는 "과학적 진실은 합의로 결정되지 않는다. 진실은 증거와 현실을 통해 존재한다"고 했다. 결론에서는 "과학기술의 성공을 위해서는 현실성이 대중 선전활동보다 앞에 있어야 한다. 자연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1986년 2월11일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사고에 관한 청문회가 열렸다. 생중계된 이 자리에서 파인만은 간단한 실험을 시연했다. 그는 얼음물 한 컵에 고무재질의 O-링 샘플을 담가 저온에서 O-링의 탄력성이 어떻게 떨어지는지를 직접 보여줬다. 이것으로 O-링이 낮은 온도에서 탄성을 잃어 가스가 누출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게 명확히 입증됐다. 언론은 NASA의 안전절차와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비판을 기사로 상세히 보도했다. 당시 언론의 헤드라인을 보자. '파인만 박사, 간단한 실험으로 NASA의 실수 폭로'(뉴욕타임스, 1986년 2월12일) '챌린저호 참사: 과학자가 밝힌 진실'(워싱턴포스트, 1986년 2월13일) 등이다.
최근 우리는 무안국제공항 항공기 참사를 겪었다. 사고의 원인, 공항의 입지적 결함에 대한 대책, 로컬라이저 등을 포함해 항공기와 공항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와 재발방지 대책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