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특별전 '새 나라 새 미술, 조선 전기 미술대전'이 문을 열었다. 고려를 이어 새로운 나라를 세워 기틀을 다지고 이후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전란을 맞기까지 조선 전기 미술의 정수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다. 이런 까닭에 어느 전시품 하나 그냥 지나갈 수 없다. 그 중에서도 계회도(契會圖)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蓮榜同年一時曹司契會圖)다.
계회도는 어떤 특정한 사안을 공유하는 사대부가 모임을 열고 이를 기념해 그린 그림을 말한다. 연방(蓮榜)은 과거시험 가운데 소과(小科)의 합격자 명단이다. 소과 합격자는 생원과 진사가 돼 조선의 국립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할 자격을 갖는다. 그러나 바로 관직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즉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는 같은 해 연방에 오른 사람들, 즉 소과 입격자가 훗날 조정의 관료(曹司)로 출사한 것을 기념해 만든 모임을 그린 것이다. 아래 이날의 참석자 명단을 보면 정유길(鄭惟吉) 민기(閔箕) 남응운(南應雲) 이택(李澤) 이추(李樞) 김인후(金麟厚) 윤옥(尹玉) 7명이다. 순서는 현직의 고하에 따른 것으로 정유길, 민기, 남응운, 이택 4명은 각조의 정랑으로 정6품, 이추는 승정원주서로 정7품, 홍문관정자 김인후와 예문관검열인 윤옥은 정9품이다.
같은 해 입학하거나 입사한 이들이 동일한 감정을 느끼며 끈끈한 관계로 이어지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경치가 수려한 곳에 터를 잡고 관복을 갖춰 입은 동년 7명이 둥글게 앉아 각기 술상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나눈다. 미술사에는 문외한이지만 그림은 그날의 모임이 장관(壯觀)이었음을 오롯이 전한다. 그러나 내가 이 그림에 주목한 이유는 따로 있다. 아래 명단 가운데에 있는 '학생'(學生)이란 두 글자다.
학생은 벼슬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일단 동년의 관료 사이에 학생의 자제가 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고 두 번째로는 그가 조선시대의 명유(名儒) 김인후였기에 놀랐다. 위 7명 가운데 김인후의 부친 김령(金齡)만이 관품이 없다. 나중에 알아본 바에 따르면 김령은 오늘날 전라남도 장성에 살며 관직에 오르지 않고 가정을 일궜다. 그는 일찌감치 김인후의 재능을 알아봐 좋은 선생에게 보냈고 김인후는 학문적 성취로 부친에게 보답했다. 그는 성균관에 입학해 이황과 학문을 논하는 한편 뛰어난 문장실력으로 중국 사신 접대에 참여해 시를 지었다. 1541년 홍문관정자로 관로에 올라 이듬해 이 모임에 참석한 것이다. 김인후는 그림 한쪽에 이날의 모임을 "만날 때마다 진면목을 펼칠 기회가 없었기에 한가할 때를 찾아 좋은 강산 찾아간다"고 읊었다.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의 다른 참석자들의 부친은 높든 낮든 모두 관품을 가졌다. 남응운과 윤옥의 부친이 종2품 가선대부로 제일 높고 이추의 부친이 종9품 전력부위로 가장 낮다. 어쨌든 집안은 각양각색이었지만 그날 한 자리에 마주한 것이다. 전통시대 왕조가 무너지는 징후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가운데 하나로 네트워크의 단절을 꼽는다. 어느 시기가 되면 중앙에서 관직을 독점하며 지방에서는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막힌다. 지방 선비들의 '평생 분화(芬華)를 멀리했다', 또는 '관직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는 무덤 속 상투적 글귀는 시쳇말로 '정신승리'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훗날 김인후는 성리학의 대학자로 후학의 존경을 받았으며 문묘(文廟)에 배향됐다. 그리고 그를 기리고자 세운 필암서원은 이제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돼 많은 이가 찾는 명소가 됐다. 김인후가 그 영예를 누리기까지는 그의 탁월한 인품과 학문적 업적이 가장 큰 역할을 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를 발견하고 자리매김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출신에 관계없이 모두를 한자리에 모은 시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전시의 제목 '새 나라, 새 미술'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