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데니태극기, 빛으로 펄럭이다

이태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2025.07.25 02:05
중앙박물관 이태희 연구관

"이제 새집과 보금자리도 안정을 찾았습니다. 또한 좋은 급여를 받고 있습니다만 제가 이곳에 계속 머물 수 있을지는 결국 이 나라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 있는 성과'를 일궈내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지금 제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제가 도착한 뒤로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무척이나 고요합니다. 그러나 이 평온함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폭풍 전의 고요가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웬 니커슨 데니(1838~1900년)가 1886년 6월20일 조선 한성에서 상하이에 있는 오랜 벗 W S 웻모어에게 보낸 편지다. 바로 두 달여 전인 4월8일 데니는 고종으로부터 '협판내무부사 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장교사당상'(協辦內務府事兼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掌交司堂上)이란 긴 이름의 관직을 제수받고 조선의 외교고문이 됐다. 조선이 두 번째로 맞이한 서양인 외교고문이었다.

첫 외교고문인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조선과 러시아제국의 밀약을 도모하다 청나라의 미움을 사 강제해고됐다. 청은 묄렌도르프를 대신할 사람으로 미국의 주상하이총영사였던 데니를 추천했다. 조선은 망설였다. 고종은 내심 미 해군 제독 슈펠트를 마음에 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청의 의도를 거절할 수 없었던 고종은 민영익에게 데니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게 했다. 민영익은 미국 대리공사 포크를 찾아가 물었고 포크는 "사람됨이 쓸 만하고 크게 인망이 있어 여러 장점이 도리어 슈펠트보다 상당한 자격을 갖췄다"고 말했다. 데니는 이렇게 조선에 왔다.

데니도 편지에서 말했듯 그는 조선에서 후한 대우를 받았다. 계약기간에 조선은 그에게 월봉으로 은(銀) 1000냥을 주었다. 요즘 가치로 추산하면 연봉 6억원에 달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받는 대우에 걸맞은 성과를 내고자 노력했다. 내년이면 140주년을 맞는 한불수교, 즉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은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에 불리한 불평등조약이었으나 서구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 수립이 국제사회로부터 주권을 인정받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은 데니를 이용해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그는 고종의 신뢰에 부응했다. 그의 이런 태도는 당시 조선에 머물며 내정을 간섭한 위안스카이에게 눈엣가시가 됐다.

1889년 음력 9월 왕비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서울에 주재하는 각국 대표를 초청했다. 행사를 주관한 조병식은 청나라 대표 위안스카이의 자리를 참석자 가운데 가장 상석에 뒀다. 당시 위안스카이는 조선에서 무소불위의 특권을 누렸다. 조선 총독처럼 행세하며 외교사절과는 구분 짓고 싶어 했고 이에 외교사절들도 그를 감국대신(監國大臣)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행사가 시작되기 직전 데니는 위안스카이의 자리를 외교사절 자리로 옮겼다. 행사장에 도착한 위안스카이가 항의하고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데니는 청의 간섭을 배제하고 조선의 자주권을 확보하고자 광산개발, 차관도입, 서북 전신망 부설 등을 시도했다. 그러나 매번 청의 간섭에 가로막혔고 결국 1890년 계약기간이 만료되자 바로 귀국했다. 그가 조선에서 활동하며 남긴 일기, 서간, 메모 등의 기록은 개항 이후 조선의 외교활동을 살펴보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태극기다. '데니태극기'로 불리는 것으로 옛 태극기 가운데 가장 크며 현전하는 태극기로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81년 '데니태극기'를 보관해온 데니의 유족, 윌리엄 랠스턴은 우리 역사에 더없이 귀중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것을 알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연말연시 루미나리에 명소인 신세계스퀘어에서 지난 제헌절부터 '데니태극기'가 나온다. 광복 80주년을 맞은 올해 빛을 회복한 것을 기리며 빛의 마을, 명동에서 빛으로 펄럭이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데니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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