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누군가를 '낭만적'이라고 평가한다면 아마도 칭찬으로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을 잘 모르고 이상에만 빠졌거나 이성보다 감정에 휩쓸린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보통 그 반대말로 '이성적'이나 '현실적' 성향을 꼽을 정도니 요즘 말로 쿨하지 않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듯 보일 수도 있다.
낭만(浪漫)은 한자로는 '물결이 흐트러진 모습'의 뜻이지만 본래 음차어로 그 어원이 일본 메이지시대의 번역어에서 왔다고 알려졌다. 낭만의 일본어 발음은 '로망'(ろうまん)인데 소설과 같은 허구문학 장르를 가리키는 서구 용어 '로망'(roman/romance)을 표기한 것이다. 하지만 자유롭게 흩어진 물결처럼 '제멋대로 한다'는 그 뜻만으로도 '낭만'은 규범과 당위에 얽매이지 않는 감각적 자유를 표방하는 서구의 낭만주의 사조를 잘 대변하는 것 같다.
낭만주의는 17세기 이후 유럽을 지배한 고전주의와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다. 보편적 인간성 담론이나 합리적 이성에 따르는 진보주의에 대한 거부였다. 당시는 18세기가 19세기로 넘어가는, 말 그대로 급변하는 시대의 한가운데였다. 예를 들어 1770년대 서구에서 출생한 사람은 그 이전 세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된다. 방적기계 발명으로 시작된 산업혁명의 흐름을 타고 기계와 함께하는 노동을 시작했을 것이고 중년 이후엔 증기기관차를 타고 먼 곳까지 여행을 다닐 수 있게 됐고 1830년대엔 완성된 사진기술을 통해 자신의 초상을 그림이 아니라 현실과 똑같은 이미지로 남겨놓을 수 있게 됐다.
기계화와 자동화라는 놀라운 기술발달의 흐름 속에서 모두가 발전하는 역사의 밝은 미래를 찬양했다. 과거는 극복해야 할 미신의 기원이 되고 상상은 신비주의의 유산으로 억압됐다. 하지만 당시 낭만주의자들은 오히려 잊히는 어둠에 주목했다. 그들은 근대가 제시하는 목적론적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기보다 망각된 과거의 신화적 잔여나 꿈의 이미지들을 현재에 소환하려 했다. 진보주의가 신봉하는 선형적 시간이란 논리적으로 구성된 연속 서사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오래된 희망과 꿈의 조각들이 우리의 현재를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2세기가 지난 오늘날 다시 낭만이 귀해진다. 예를 들어 1960~7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기술발전의 소용돌이 안에서 살았다. 개인용 컴퓨터 사용이 일반화하면서 우리 삶의 모습도 그 업그레이드 속도에 맞춰졌다. 어느 순간 모두가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됐고 이제 그것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이제는 너도나도 '시대에 뒤처지지 않도록' SNS를 체크하고 AI를 잘 다룰 수 있는 프롬프트를 공부한다.
모두가 빛의 방향과 속도를 좇을 때 잊히는 것들을 붙잡으려 한 낭만주의자들을 추억한다. 나의 꿈을 이야기했을 때 누군가의 한심하다는 표정을 마주한 기억. 한 번쯤 영원할 것 같은 사랑에 매달린 기억. 우리가 현실감각이나 성장의 경험과 맞바꾼 것은 그런 꿈과 열정이다. 낭만주의자가 미련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부럽기도 한 이유다.
역사를 알고 미래를 예견하며 현실을 판단하는 통찰은 소중하지만 회의와 냉소가 지배하는 사회는 오히려 불안을 내포한다. 낭만을 굳이 냉소로 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같은 시대의 모든 사람이 자랑스러워하는 연속된 성공의 역사에 대해 가보지 않은 길이라는 단절과 실패한 망각을 끌어오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는 혹시 현실에서 무엇이 중한지를 끊임없이 저울질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믿고 사랑하라'는 낭만주의자의 속삭임을 그리워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