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지대'가 넓어져야 하는 까닭 [딥포인트]

홍승일 논설고문
2026.10.08 02:00

흑백논리 판치는 시대, 회색지대 중요
부동산 등 편향적 정책의 중도 균형추
개딸·극우 기대는 위정자 견제 역할도

지난달 개막한 광주비엔날레 대만관의 전시 주제는 '회색지대'다. 전쟁도 평화도 아닌 어정쩡한 정세를 장기간 겪어온 대만의 특수성, 지정학적 긴장과 불확실성, 갈등 구조를 예술적 시선으로 풀어냈다. '하나의 중국'을 양보할 수 없는 중국 정부가 '대만관' 명칭 허용에 반발해 중국관을 철수하는 외교적 파행까지 빚어졌는데, 이 상황이 공교롭게도 회색지대라는 주제와 맞닿아 흥미롭다. "대만이 처한 지정학적 위치뿐만 아니라 기술과 정보, 기억과 역사까지 다양한 층위의 회색지대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주최 측 설명이다.

새삼 '회색지대(Grey Zone)'가 눈에 밟힌 건 우리 사회가 겪는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는 데 시급한 개념이어서다. 흑백논리와 확증편향, 정치 양극화, 일방통행식 정책이 횡행하는 현실을 타개할 회색지대 사람, 즉 '회색인'을 떠올려 본 이유다. 한국 사회의 온갖 이슈는 선악·찬반·피아라는 양자택일과 진영논리의 극단적 소용돌이 속에 매몰돼 있다. 극성 당원의 입김에 휘둘리는 거대 정당들은 정책을 고안할 때 '집토끼'가 좋아할 만한 '정답'만 설정해 밀어붙이곤 한다. 여야를 막론하고 중도 확장에 게으르기는 마찬가지다.

"열성 당원은 당권을 만들지만, 중도는 정권을 만든다"는 말처럼 중도 회색은 은근한 색깔이면서 중도·중립 지대를 조성할 힘이 있다. 진보 진영이 시장실패에 깊이 개입하다가 더 큰 정부실패를 초래할 때, 또 보수 진영이 온건 합리성을 벗어날 때 이를 견제할 세력은 정책의 비용 편익 균형감각이 있는 '회색인' 유권자들이다. 흑백이 아니라 회색을 강조한 개념이 '회색코뿔소'다. 2013년 세계경제포럼에서 등장한 회색코뿔소는 드물게 발생해 예측이 어려운 '블랙스완(검은 백조)'과 대비된다. 이미 경고신호가 거듭돼 태만하지 않으면 대비 가능한 위험을 뜻한다.

현 정부의 치우친 부동산 정책에서 중도 회색인의 역할은 없을지 한 부동산 전공 교수에게 물어봤더니 씁쓸한 경험담을 들려줬다. 한 진보 성향 시민단체 요청으로 회원 대상 특강에 나섰다가 호되게 당한 이야기다. "종합부동산세를 무리하게 밀어붙이다 노무현·문재인 정권이 역풍을 맞았다. 복잡다기한 시장에 섣불리 개입하지 말고 민간에 좀더 자율성을 줘야 한다"는 취지로 강연했더니 청중의 반발이 거셌다. "세금만 세게 때리면 집값이 잡힐 텐데 우물쭈물해서 효과가 없었던 것 아니냐"는 훈계부터 "교수님 현실을 잘 모르는 것 같으니 현장 공부 더 하고 오시라"는 핀잔까지 돌아왔다.

집토끼의 확증편향에 휘둘리는 영역은 부동산뿐만이 아니다. 정부여당은 사법 개혁, 공소취소법, 노란봉투법, 주 52시간 근로제, 미래안정기금 등 주요 정책을 다룰 때도 핵심 지지층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 미래안정기금의 용처가 정권의 쌈짓돈이 되면 곤란하고 빚 갚는 것이 우선이다. 남은 돈은 청년 세대를 위해 알뜰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 회색인의 상식이다.

6.3 지방선거 서울시장 선거에서 여당이 진 것은 부동산 정치화의 역풍 탓이라는 지적이 많다. 민감한 정비사업을 진보에 유리한 쪽으로 풀려다가 지지율을 잃었다는 것이 김준형 명지대 교수 등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다주택자에서 시작해 임대사업자, 아파트 부자, 심지어 비거주 1주택자까지 규제책을 동원해 매각을 독려했으나 돌아온 건 서민의 전월세 불안이었다. 사법 개혁은 또 어떤가. 중도가 그리는 그림은 검찰의 완전 해체가 아니라 특수수사권을 합리적으로 손보는 정도였을 것이다.

회색지대 이론은 20세기 '복잡계' 개념 확산과 명쾌한 결론에 대한 의구심 속에서 발전했다. 흑백논리와 선명성의 함정에 빠진 정책의 부작용은 심각하다. 흑백논리는 상대를 악마화한다. 정당 공천, 정치인 발언, 정책 우선순위에 시시콜콜 영향을 미치며 협치는 야합과 배신이다. 그럴수록 "진실은 양극단이 아니라 그 중간 어디쯤에 있다"는 회색지대 철학을 위정자들은 더욱 되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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