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과정 예산 미편성으로 유아교육 현장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설마, 그래도 지원금이 곧 나오겠지'라는 기대심리가 여전히 높지만, 일각에서는 체념과 원망, 분노의 감정도 읽힌다.
지난 22일 오전 8시경 서울 구로구 개봉동 인근.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밀집한 이 지역에는 여느 때와 같이 아이들을 데려다 주는 학부모들의 발걸음이 줄을 잇고 있었다. 영하 10도에 달하는 강추위에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온몸을 꽁꽁 싸맨 모습이어서 그런지 아이를 배웅하고 돌아서는 부모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일곱 살 딸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돌아서던 김수진씨는 "이번에는 진짜인 것 같다"고 말했다. 매년 앵무새처럼 되풀이되던 내홍이지만 지원금이 실제로 끊긴 지금, 가장 크게 위기의식을 느낀다는 뜻이었다. 그는 자녀가 오는 3월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어 부담이 비교적 덜한 편이지만 주변 학부모들의 걱정은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전했다.
김씨는 누리과정 예산 편성이 최종적으로도 좌초되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유치원(장), 학부모, 교사 모두에게 좋지 않은 결과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월급 지급이 되지 않아) 교사가 줄면 아이들에게 그만큼 소홀해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전업주부들은 학습지로 눈을 돌리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발길을 옮기던 그는 "특정 지역만 예산 편성이 안 된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고개를 젓기도 했다.
그 때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연달아 남자 아이들을 배웅하는 학부모 김모씨(37·여)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엄마와 인사를 나누고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김씨는 누리과정 취재라고 밝히며 말을 걸자 "진짜 (지원)안 되는 거에요?"라고 놀란 얼굴로 기자를 바라봤다. 아이 보육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구 소식지 이야기를 믿고 있었다는 그는 "그럼 이제 어떡하나"라면서 시린 손에 입김을 불어 넣었다.
지원금이 끊길 경우 유치원과 어린이집 이용은 무리라던 김씨는 "나는 자영업을 하니까 끼고(아이를 곁에 두고) 챙기면 되지만, 워킹맘들은 정말 큰 일"이라면서 "나도 신랑이랑 의논해서 태권도와 유치원 중 둘 중 하나를 끊던지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말했다.
원장들의 고심은 더욱 컸다.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아직까지는 기대를 거는 모습도 있었지만, 우려와 혼란에 빠진 모습은 공통적이었다.
개봉동 정훈유치원에서 만난 허태근 이사장은 "(보조금을) 주다가 안 준다는 건 곤란한 노릇"이라고 말했다. "처음부터 안 줬으면 살아날 길을 찾을 수 있었다"고 되짚은 그는 "30여년간 유치원을 꾸려왔는데 지금만큼 기억에 남을 상황도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누리과정 예산이 안 나오는 건 상상되지도 않고 상상해 보지도 않았다"면서 꼭 나오길 기대할 뿐"이라고 정부와 교육청 간의 극적인 타협에 기대를 거는 모습이었다.
유치원의 경우 학부모들의 부담이 당장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지난 20일 한국유치원연합회 서울지회는 이번 주까지 상황이 정상화되지 않을 경우 누리과정 보조금에 해당하는 22만원 인상을 다음주부터 학부모들에게 고지하겠다고 밝혔다.
어린이집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구로구의 은비 어린이집에서 만난 심철 대표(구로구 민간 어린이집 연합회 부회장)는 격앙된 목소리로 "분노가 치민다"고 현 상황을 성토했다. 어린이집 안은 추운 날씨로 결석한 몇몇 어린이를 빼면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를 비롯한 교사들은 적지 않게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10년 넘게 아이들을 돌봐왔다는 권용 교사는 "일단 월급이 밀리면 생활이 어려워지지 않느냐"면서 "애들 앞에서는 내색할 수 없어 더욱 더 힘들다"고 누리과정 예산 미편성에 따른 임금 체불을 우려했다. 걱정 어린 학부모들의 전화도 부쩍 늘었다고 했다.
그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좋게 되겠죠', '시간이 흐르면 좋은 방안이 나오지 않을까요'라고 뻔한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며 불투명한 현재 흐름에 따른 스트레스가 적지 않음을 털어놨다.
심철 대표의 목소리는 그보다 한층 더 떨렸다. 상기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의 몸짓은 말 그대로 현장의 '혼란'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그는 "짜증과 배신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면서 "며칠 내로 해결되지 않으면 사생결단을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누리과정 예산이 어린이집 운영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만큼 각 원장들이 모여 단체행동을 불사할 것이란 얘기였다.
이어 "우리는 그렇다 쳐도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나면 정말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올 거다. 이때는 누가 책임질 거냐"고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며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게 이런 꼴이다. 아이들은 무슨 죄냐"고 씁쓸해 했다.
그 무렵, 심 대표의 목소리 너머로 "꺄르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대표실 유리창 밖에는 어린이 40여명이 피자와 치킨, 요구르트를 두고 생일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웃는 얼굴로 방을 뛰어다니던 아이도 있었다. 취재를 마치고 자리를 뜨던 차에 4~5세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기자를 바라보던 꼬마 아이의 눈빛에는 근심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른들은 이런 눈빛들을 계속 지켜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