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현실 정치인이 된 것도 아니고 자기 정체성을 버리지도 못하고, 옆에 있는 놈들은 90도 사과하라고 하고……. 하고 나서도 이렇게 한 것이 내 철학과 맞는 지 고민이 있었다. 마지막(사퇴) 이틀 전에는 아주 힘들어 했다. 내가 보기엔 죽을 자리를 찾아간 것이었다. 저 자리에서 죽겠다고." (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 사퇴를 가까이서 지켜본 한 새누리당 국회의원)
'천하의 유승민'도 인간일 뿐이고 정치적 시련을 처음 겪어 본 '초짜'였다. '준비되지 않았던 거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배신의 정치'와 '소신 정치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햄릿'이었다.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청와대의 반발이 의외로 격렬하게 터져나오자 유승민은 "욕을 하도 먹어서 이제 이골이 났다"면서도 "'BH'의 욕을 덜 먹는 방법이라도 찾아봐야겠다"며 농반진반 걱정을 드러냈다. 대통령의 진노를 풀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해야겠다며 "일본 정치인들이 사과할 때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듯" 제스춰를 보여달라는 동료 의원들의 주문에도 충실히 따랐다.
사태 초반 "(박근혜 대통령과 유승민) 둘 다 똑같다"는 말에 "아니다. 정말 정말 다르다"고 손사래를 치던 그는 사퇴 기자회견에서는 "정치 생명을 걸고" 법과 원칙을 지키는 박근혜식의 고집스러움을 보이기도 했다.
새누리당 원내부대표로서 유 전 원내대표를 지켜본 한 새누리당 의원은 "갑신정변 느낌이 많이 났다"며 "구체적인 로드맵 없이 그날그날 벌어지는 상황에 대처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김무성이 정치인이지. 정치인이야 표많이 주는 사람이 최고거든. 유승민은 정치인이라기보다 자기 소신이 있는 지사같은 면이 강하다. 유승민이 그렇게 표현을 하더라. 뭘 할 때 마음이 시켜서 해야 하는데 자신사퇴는 마음이 시키지 않는다는 거다."(비박 재선 서명파 20인중 한 새누리당 국회의원)
지난 6일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유승민 사퇴의 부당함을 앞장서서 주장해주던 비박 재선 국회의원들도, 원내대표단 일부도 국회법 개정안 재의를 무산시킨 후 자진사퇴하는 것이 좋겠다며 유승민을 설득했다. 사태가 이 정도에 이르렀으면 물러나는 것이 유승민 개인에게도 득이 된다고 말이다.
유승민도 그것이 자신이 덜 다치는 길이란 걸 안다고 했다. 그렇지만 마음이 기껍지 않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앞서 개인의 문제를 떠난 일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는 현실에서 당장은 패배하더라도 19대 국회가, 박근혜정부가, 우리나라 정치가, 대한민국이 후퇴하는 일은 만들지 말아야 했다.
유승민을 지켜보는 국민들의 눈도 늘었다. 이제 이 문제는 유승민만의 문제도, 집권여당 원내대표만의 문제도 아니게 됐다. 국민들은 대통령 권력이 과도하게 행사될 때 이에 저항하고 이를 막으려 하는 정치인의 모습이 가능할 지를 보고 있었다. 유승민 기사에 "제헌절까지 버티세요. 그러면 됩니다."란 댓글이 달렸다.
일부 친박 의원들이 사퇴 시한으로 정한 6일이 지나갈 즈음 유승민의 최측근 중 한 명인 한 새누리당 의원은 "대표님은 자신을 지지해 준 분들을 실망시켜서는 안된다는 생각은 분명하다"며 "이분들이 버티라고 하는 얘기가 원칙적으로, 이론적으로 맞다고 생각한다. 지지해 준 분들의 뜻을 따를 수 있다"고 말했다.
"김무성한테도 배워야할게 많고 유승민한테도 배워야 할게 많다. 그런데 요새 보면 머리는 김무성한테 배우고 가슴은 유승민한테 배워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가까운 한 새누리당 의원)
정치인이 이해득실을 따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정치'의 불가피한 점이라지만 정치인의 득과 실을 가르는 것은 국민의 판단이다. 정치인이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득실을 계산하는 머리보다 국민을 굳게 믿는 가슴을 따라야 하는 이유다.
흔들리던 유승민이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은 또다시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였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헌법 제1조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구절에 있다고 국민들에게, 또 스스로에게 자답했다.
새누리당 대다수의 국회의원들은 가슴보다 머리를 따라 유승민의 원내대표직 사퇴를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받아들였지만 국민들은 유승민을 단숨에 여권 차기 대권주자 1위로 올려놓았다. 비록 일시적이라 하더라도 국민들이 머리보단 가슴으로 움직이는 정치인을 갈구하고 있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또한 국민들이 다른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에게도 '왜 정치를 하는가'란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