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개문발차

김준형 기자
2015.09.25 06:05

[the300]

버스 안내양이 있던 시절, 버스 출입문 위에 ‘개문발차, 절대금지’라고 빨간 글씨가 씌여 있었다. 승객이 다 내리거나 타지도 못했는데 문도 못 닫은 채 출발하는 일이 흔하던 만원버스, 앳된 소녀 안내양들이 문 양쪽 손잡이를 잡고 매달려 온몸으로 승객을 쑤셔 넣으려 안간힘 쓰는 모습은 지금 떠올려도 애잔하다.

그런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개문발차(開門發車)’가 언제부터인지 정치권 용어가 됐다. 준비나 절차 다 따질 여유가 없으니 일단 가고 본다는 말이다.

선거의 계절이 다가오면 '신당'이 등장하고, 그때마다 회자되는 말이 '개문발차'다. 일반 사람들이 보기엔 별로 새로워 보이지 않고, 기존 정당하고 뭐가 다른건지 잘 구분도 되지 않는데다가, 심지어 누가 함께 가는지도 모르는데 일단 '오라이' 발차시키고 본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어김없이 개문발차 대열이 시작됐다. 23일엔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을 맡고 있던 박주선 의원이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해 신당 창당을 선언했다. 그보다 사흘전엔 천정배 의원(무소속)이 개혁적 국민정당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앞서 15일에는 박준영 전 전남도지사가 '신민당' 기치를 내걸었다. 각각 출발한 미니버스 3대는 모두 '정권교체'라는 같은 행선지 푯말을 내걸고 있다.

하지만 개문발차 정당은 대부분 종점에 도착하지 못하고 다른 노선으로 경로를 바꾸거나 중간에 멈춰서곤 했던게 과거의 경험이었다.

열려진 문을 통해 뒤늦게 뛰어 탔던 승객은 넘어지기도 하고 중간에 내리기도 하고, 흔적도 없이 실종되기도 한다. 지난해 재보선때 출발한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연합 역시 국민적 관심은 컸지만 개문발차 정당의 운명을 그대로 밟았다.

'개문발차'는 창당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23일로 끝난 '전반기 국정감사'에선 여야가 전격적으로 합의해 출범했던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특별 국감'이 당일날 취소되는 민망한 상황이 일어났다. 일단 특별 국감을 하자고만 합의했지, 세부 증인에 대해선 제대로 논의도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새벽부터 국감장에서 대기하던 다른 증인들은 한마디도 못한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여야가 논란끝에 추석을 전후해 두차례에 나눠서 국감을 치르기로 날을 잡았지만, 준비도 없이 시작한 국감은 활기를 잃었다. 당 내분으로 혼란스런 야당, 총선을 앞두고 지역구에만 관심있는 의원들로 국감장은 썰렁해지기 일쑤였다.

국회에선 일단 통과시켜놓고 보자는 식의 '개문발차법'도 수두룩하다.

아동인권 보호를 위해 양부모의 조건 심사를 강화하고 출생신고를 의무화 하도록 한 입양특례법 개정안이 2012년 8월 개정된 이후, 국내입양이 크게 줄어들고 버려지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신의진 새누리당 의원은 "부작용에 대한 경고가 있었지만 '아동인권보호'라는 목표만 생각하고 일단 법을 통과시켰다"고 지적했다.

추석선물에 쓰이는 농수산물은 적용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농어촌 지역구 의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김영란법' 역시 크게 보면 개문발차다. 출석 247명 중 찬성 226명, 반대 4명, 기권 17명의 압도적 표차로 출범시켜놓고선 이제야 경제에 미칠 악영향, 위헌성까지 거론하며 국회내에서 개정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렇듯 국회에서 일단 통과시켜 놓고 나면, 국민들이 뒷감당을 해야 하는 법안들이 한두개가 아니다.

개문발차가 불가피했던 시절도 있고, 때론 꼭 필요한 상황이 있을 순 있다. 하지만 문 안닫고 출발하는게 아예 일상화 되다보면 부작용과 비용, 희생이 커질수 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세월호 참사도 '개문발차' 의식에서 비롯된 거다.

개문발차 사고는 도로교통법상 '승객추락방지 의무'를 위반해 발생하는 11대 중과실 교통사고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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