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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갓 넘긴 22일 새벽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들렸다. 8시간 후 아직 날이 온전히 밝기도 전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빈소를 찾았다. 고인이 자신의 '정치적 아버지'라며 상주 역할을 하겠다고 자처했다. 뒤이어 빈소를 찾은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 역시 김 전 대통령을 '정치적 대부'라고 표현했다.
이날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은 이들 두 정치인은 23일과 24일에도 국회 주요 회의 일정을 제외하면 상가를 지켰다. 아들(상주)다운 모습이다.
하지만 김 대표와 서 최고위원은 주요 인사 영접을 제외하면 따로따로 별도로 추모객을 맞았다. 친박과 비박으로 나뉘어 반목하던 모습이 상가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한 아버지를 둔 '정치적 형제'라기엔 어색하다.
김 전 대통령 서거로 정치적 숙적이었던 상도동계와 동교동계도 구원(舊怨)을 풀고 화해에 나서고 있지만 정작 당내 서열 1, 2위인 이들은 '천붕'(天崩) 앞에서도 앙금을 씻지 못했다. 서거 직전 필담을 통해 마지막으로 남긴 '통합'과 '화합'이라는 고인의 유지가 무색하다.
김 전 대통령의 유지와 어긋나는 것은 비단 이들의 대립만은 아니다. 이들은 최근 국정교과서 '전도사' 역할을 자처했고 결국 국정화 확정고시를 이끌어냈다.
이는 '역사바로세우기'를 주창한 김 전 대통령의 행보와 거리가 있다. 고인이 재임 중인 1996년 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쿠테타를 '5.16 군사정변'이라고 기술했다. 기존 교과서의 '군사혁명' 표현은 사라졌다. 1997년에는 제7차 교육과정 고시를 통해 국정 교과서를 검인정과 병행하도록 제도를 개혁하기도 했다.
당시 김 대표와 서 최고위원은 민정수석, 정무장관으로 정부의 주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18년 후 문민정부가 주도한 검인정제를 다시 국정체제로 되돌리는 데도 '공'이 컸다.
독재정권에 대한 입장 역시 정치적 아버지와 아들들 사이에는 작지않은 간극이 있다.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자유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 26세의 나이에 정계에 입문했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사오입'에 반발, 탈당했다. 이를 계기로 고인은 민주화 투쟁의 대들보이자 야당의 '거산'(巨山)으로 성장했다.
이와 달리 김 대표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 재평가 목소리를 가장 크게 주장하는 정치인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서 최고위원 역시 기존 보수진영의 입장에 뜻을 같이 한다.
박정희 정권에서도 민주화 투사를 자처한 김 전 대통령은 결국 헌정 최초로 의원직 제명을 당했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 역시 이를 계기로 탄생했다. 생전 그는 독재정권과 화해하지 않았다.
당시의 앙금 때문인지 김 전 대통령은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을때도 지지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독재자의 딸", "칠푼이"라는 혹평도 더했다.
이와 달리 김 대표와 서 최고위원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이다. 서 최고위원은 여전히 친박 좌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김 대표 또한 여당 대표로서 4대개혁부터 국정교과서까지 박근혜정부 주요정책 지원에 온힘을 쏟고 있다.
이들 정치인들을 과연 고인이 정치적 아들로서 인정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야당 일각에서는 정치적 유산만을 탐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도 제기하고 있다.
YS의 '정치적 아들' 자격을 논하기 위한 질문은 여럿 있겠지만, 요즘 정치권에서 자주 거론되는 두가지 문제만 들어보자.
'5.16은 쿠데타인가?'
'대한민국 정통성은 1919년 임시정부부터인가. 아니면 1948년 정부수립부터인가?'
박근혜정부 들어 고위인사 청문회 대상자 가운데 상당수는 이에 명쾌한 답을 하지 않았다. 김 대표와 서 최고위원의 생각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참고로 김 전 대통령은 취임 100일인 1993년 6월 3일 기자회견에서 "5.16은 분명히 쿠데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새 문민정부는 임시정부의 빛나는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며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