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인 세종대왕은 후대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위인이기도 하다. 알려진 그의 업적과 애민정신은 50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일반인들에게 큰 존경과 사랑을 받기에 충분하다는 평이다.
그는 당대에 이미 '해동요순'(중국 동쪽의 요임금·순임금)이라고 불리면서 신격화될 정도였다.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종의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元正),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그는 조선 제3대 왕인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로 1397년 5월 15일 태어났다.
셋째 아들이었던 그가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던 건 장자인 양녕대군의 기행도 한몫했지만 세종의 학문에 대한 태도가 주된 이유였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은 세종을 세자로 삼을 당시 "충녕대군(세종)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며, 치체(治體·정치의 요체)를 알아서 매양 큰일에 헌의(獻議·윗사람에게 의견을 아룀)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기에 왕세자로 삼는다"고 밝혔다.
세종은 집현전의 연구기능을 확대해 정인지∙성삼문∙신숙주 등 당대의 수재들에게 다양한 분야에 대해 연구하도록 했다. 이에 윤리∙농업∙지리∙측량∙수학 등의 관련한 책이 편찬됐다. 조세∙재정∙형법∙군수∙교통 등에 대한 제도도 정비했다.
세종은 과학기술과 예술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을 설치하고 장영실 등을 등용해 혼천의∙앙부일구∙자격루를 만들어 농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생활에 실질적인 도움을 줬다.
특히 그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1443년 쉽게 배울 수 있으면서 과학적인 문자 체계로 평가받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했다. 훈민정음은 400년여 뒤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발전돼 현재 대한민국과 한반도에서 공식 문자로 쓰이고 있다.
국방에 있어서도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해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했다.
세종이 당시의 백성들에게 요·순임금에 버금가는 칭송을 들었던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자주 은전을 베풀었고 사면령도 빈번히 내렸다. 노비에 대한 처우도 개선해줬다. 특히 세종 이전에는 겨우 7일에 불과하던 관비의 출산휴가를 100일로 늘렸고 남편에게도 휴가를 줬다.
다양한 분야에서 끊임없는 고뇌와 연구를 이어가던 세종은 젊은 시절부터 육체의 한계에 부딪혔다. 세종실록에도 세종이 30대부터 질병이 발병했다는 기록과 40대엔 여러가지 병에 시달린 탓에 "체력이 달린다"는 고충을 토로한 것으로 나온다.
세종의 병세는 악화돼 제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 됐고 1445년부터 세자 향(문종)에게 섭정을 하도록 했다. 결국 5년 뒤인 566년 전 오늘(1450년 3월30일) 54세를 일기로 승하한다. 세종대왕의 흔적은 우리나라 곳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1972년 이후 현재까지 대한민국 만원권 지폐의 초상화에 등장하고 있고 2012년 7월1일엔 그의 묘호를 딴 행정수도인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