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력공사 직원들이 업무 과중 등을 이유로 배전 공사 협력업체에 설계 업무를 맡긴 사실이 감사에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확인된 과다설계 규모는 294억원에 달했고, 이 가운데 대리설계가 확인된 공사의 과다설계액만 18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대리설계의 75%가량이 광주전남 지역에 집중됐지만, 과다설계 금액을 협력업체로부터 환수하거나 관련자에게 구상권을 청구한 사례는 한 건도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5일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박수민 국민의힘 의원이 한전에서 제출받은 7차례의 '특정감사 보고서'를 보면 전체 과다설계는 2632건, 금액으로는 294억2199만원으로 집계됐다. 이 중 1534건(180억5065만원)에서는 대리설계가 확인됐다. 감사는 2024년 3월부터 2025년 11월까지 전국 사업소를 대상으로 이뤄졌다.
대리설계는 배전 공사를 맡은 협력업체 직원이 한전 직원의 요청을 받아 해당 직원의 ID로 시스템에 접속해 설계 업무를 대신하는 행위다. 한전 직원들은 업무가 바쁘거나 설계 업무에 익숙하지 않다는 등의 이유로 협력업체에 대리설계를 맡긴 것으로 파악됐다.
문제는 공사 물량을 결정하는 설계 업무를 실제 공사를 수행해 수익을 내는 협력업체가 대신하게 된다는 점이다. 한전은 감사보고서에서 "만약 배전 협력회사가 임의대로 설계해 불필요한 설계를 시행하는 등 과다 설계를 통한 매출 확대를 시도한다면 우리 회사의 예산 낭비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전은 예산 낭비를 막기 위해 '설비 보강·유휴 설비 철거는 별도 공사로 시행한다'는 방침을 마련했다. 그러나 감사보고서에서는 이 같은 방침을 어긴 사례가 다수 확인됐다.
광주전남본부의 한 지사 전력공급부에서 근무한 A 대리는 협력회사에 "업무가 바쁘다"는 이유로 대리설계를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7억4883만9475원의 과다설계가 발생했다. 이 밖에도 3억1099만3670원, 7507만6538원 등의 과다설계 사례가 확인됐다.
전국에서 확인된 대리설계 1534건 가운데 1150건(75.0%)은 광주전남에서 발생했다. 금액으로는 142억7995만원에 달한다. 한전 감사실은 광주전남에서 대리설계가 집중된 데 대해 본부 차원의 점검·통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부적정한 업무 처리가 장기간 반복됐다고 지적했다.
한전은 대리설계와 관련해 직원 28명을 징계하고 설계 결재 절차와 시스템을 개선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박 의원실이 1~7차 특정감사의 조치 내역을 분석한 결과, 과다설계 금액을 협력업체로부터 환수하거나 관련자에게 구상권을 청구한 사례는 한 건도 없었다.
보안 위규가 적발된 협력업체 255개사 가운데 179개사에는 위약벌이 부과됐지만, 나머지 76개사에는 계약과 사업이 모두 종료됐다는 이유로 위약벌이 부과되지 않았다. 한전은 법률 검토 결과 사업이 종료된 업체에 대해서는 지출금액 조정을 통한 위약벌 정산이 불가능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과다설계 금액이 가장 많았던 업체(9억3000만원)와 두 번째로 많았던 업체(8억5000만원)에도 위약벌이 부과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박수민 국민의힘 의원은 "한전 직원이 '바쁘다'며 설계를 시공업체에 떠넘기고, 그 업체가 자기 공사 물량을 사실상 스스로 정하도록 만든 것부터가 상식 밖"이라며 "과다설계가 발생할 구조를 만들어놓고 사후 책임조차 제대로 묻지 않았다면 단순한 관리 부실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