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 앞에서 보자"
휴대폰이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1990년대 초반. 신촌 연세대 앞에서 누군가와의 약속을 잡아봤다면 한 번쯤 해봤을 말이다. "도착하면 카톡할게"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가게 앞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따라 흥얼거리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설렘. 그 설렘이 이제 앨범 속 페이지가 된다. 1991년 6월부터 25년 가까이 신촌 연세로 한 켠을 지켜오던 '향음악사'가 문을 닫는다.
지난 4일 오후 4시반,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흐린 날씨 탓에 향음악사 앞은 더 어두워 보였다. 가게 뒤편 신촌 거리에선 개강파티와 신입생 환영회 준비가 한창인 것과 대조적이다. 5.5평 남짓한 가게 안에는 'ㄷ'자 모양의 CD장이 자리했고, 출입구 왼편 구석에 사람 한두명이 겨우 설 만한 카운터가 위치했다. 계산과 마일리지 적립 등을 위한 POS 단말기는 이곳이 2016년 서울에 존재함을 증명하는 몇 안 되는 물건이다.
◇'12일까지 재고 정리, 폐점' 소식에 이어지는 발길=향음악사는 오는 12일까지 영업하고 문을 닫는다. "그동안 성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는 메시지와 함께 재고는 50% 할인 판매한다. 할인 덕인지, 폐점을 아쉬워하는 발길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매장 안은 20여년 전처럼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CD장 곳곳에도 듬성듬성 공백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추억의 CD들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손끝으로 쓰윽 CD 제목들을 훑으면 어느새 오래 묵은 먼지가 손끝을 검게 만들고, 마침내 주인을 찾은 CD는 계산대 앞 놓인 물티슈에 닦여 주인의 품에 안긴다. 이렇게 늘어나는 매장 안의 공백들은 가수 이호석이 부른 "사물들"의 멜로디와 가사로 채워졌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 예정되지 않은 방향과 불안한 것들로 채워진 순간들"
◇오랜 손님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향'의 느낌"="1997년 청주에서 올라와 매일같이 들렀으니 한 19년 됐죠" 그 해 연세대 입학과 함께 향음악사를 드나들었다는 회사원 이모씨(38)도 폐점소식에 오랜 만에 찾아왔다.. 이씨는 "무슨 앨범을 사려고 간 게 아니라, 매일 들러 노래를 듣다 보면 어느새 CD를 사곤 했다"라고 말했다. 아르바이트 월급의 절반을 쏟아 부은 탓에 현재 소장한 앨범 중에서도 80%는 향음악사에서 사들인 것이라고. 희귀 팝 앨범이나 국내 반입이 어려웠던 일본 발매 음반, 인디밴드의 음악들도 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이날 향음악사를 찾은 다른 손님은 "친구의 SNS를 통해 폐점 소식을 접했다"고 말했다. 손에는 CD 12장을 든 채였다. 그는 "향음악사에서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을 느낀다"며 "차에서 들으려고 (CD를) 사긴 했는데, 평소 같으면 사지 않았을 것 같다"며 멋쩍은 듯 웃었다.
이름을 밝히기 꺼린 향음악사 직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스무살 무렵에 손님으로 처음 발을 들였는데 2년 전부터 직원으로 일하게 됐어요. 왜 처음에 이곳에 왔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이유 없이 그저 향이었어요"
◇"손님이 이렇게 왔으면 안 닫을 텐데"="적자가 3년 정도 이어졌습니다. 휴대폰이나 MP3, 인터넷스트리밍으로 음악을 소비하면서 자연스럽게 판매량이 떨어졌어요" 향음악사 주인 김건힐씨(51)는 설명한 폐업의 이유다.
김씨는 신촌 토박이는 아니다. 그의 집은 광진구 화양동, 서울의 정반대편이다. "1990년대 초에는 신촌이 음악과 패션 트렌드 등에서 가장 앞서나가는 장소였다. 이 장소가 맘에 들어 6개월을 기다린 끝에 가게를 열었다"고. 당시에는 향음악사 뿐만 아니라 목마레코드, 태림레코드, 키티사운드 등 신촌에만 5~6곳의 음반 가게가 경쟁했지만 다들 문을 닫았다. 그나마 향음악사가 장수한 까닭에 대해 김씨는 "가게 규모를 키우지 않았고, 대중음악보단 인디음악에 집중해서"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CD 10장을 팔아야 1장 가격을 남기는 상황에서 향음악사도 300만원 넘는 월세를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고객들은 더 이상 새로 나온 CD를 찾지 않기 시작했고, 한때 김씨가 매일 아침 인사를 나눴던 '음반사 영업사원'들은 오래전 사라졌다. 김씨는 "이제 매일 신보 앨범을 진열하는 곳은 대형 매장받을 수 있는 곳은 핫트랙스, 리브로 정도밖에 없을 것"이라며 "'향'과 비슷한 작은 반가게들은 재고로 남을까봐 신보 앨범 받기가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지난 3일 폐점소식을 알리자 하루 동안에만 손님 1000여명이 몰렸다. "평소에 이렇게 손님이 몰렸으며 문을 안 닫아도 될 텐데"라는 한 단골의 말은 김씨에게도 씁쓸한 추억이 됐다.
◇온라인 '향뮤직'에 집중…"음악은 영원히"=전국 음반 및 비디오물 소매업체 수는 2006년 899개에서 2014년 415개로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반면 같은 기간 온라인 쇼핑몰의 음반·비디오·악기 거래액은 806억원에서 1625억원으로 두배 이상 늘었다. 문화를 소비하는 플랫폼이 달라진 것.
그러나 김씨는 "스트리밍 방식으로는 음악을 깊게 듣지 못한다"며 "어느 가수가 불렀는지, 작곡가는 누군지, 노래를 만든 배경은 뭔지 알 수가 없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CD에는 창작자가 전하는 사연이 고스란히 담긴 반면 음원 사이트의 '인기가요 100곡'처럼 의미없이 나열된 음악은 잊혀지는 속도도 빠르다고 말한다.
김씨는 앞으로 향음악사 온라인 쇼핑몰(www.hyangmusic.com)에 집중할 계획이다. 사무실은 문 닫는 오프라인 매장 인근이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이지만 옛 단골들이 가끔 들를 수 있도록, 쇼핑몰 고객이 직접 CD를 찾으러 올 수 있도록 찾기 쉬운 곳에 마련했다. 손님들을 위해 맛있는 커피도 준비해 볼 생각이다. 절판된 옛 앨범들을 찾아 단 100장 내외라도 재발매하는 작업도 진행한다. 가게는 사라져도 '향'의 음악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