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제도 마련해도 실효성 떨어지는 이유는?

윤승영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연구위원
2016.03.18 08:12

[the L][Law Cafe][윤승영의 아메리카Law] "공정한 사회시스템, 엄격한 법 집행 통해 달성"

/그래픽=유정수 디자이너

며칠 전 나체를 몰래 촬영한 동영상이 유출돼 곤욕을 치른 여성 캐스터가 약 660억원의 배상금을 받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 내슈빌 연방법원 배심원단은 미국 폭스스포츠의 미식축구 전문캐스터인 에린 앤드루스가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동영상을 찍어 유포한 당사자에게 51%의 책임을, 그리고 내슈빌 메리어트 호텔 운영자에게는 49%의 책임을 물어 5500만달러를 공동으로 지급하라고 평결했다.

미국 법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들이 이 판결을 접한 후에 보이는 공통적인 반응은 "이 정도의 사건에 이렇게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냐"와 "몰래카메라 촬영자는 당연하지만 호텔은 왜 배상의 책임이 있냐"일 것이다.

엄청난 배상금이 가능한 이유는 '징벌적 손해배상'이라는 제도 때문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가해자의 행위가 악의가 있고 반사회적일 경우 실제 손해액보다 많은 금전배상 의무를 부과하는 제도다.

이는 피해자에게 충분한 금전적 보상이 돌아가게 하는 일반적 목적 뿐 아니라 법 위반에 대해 징벌의 효과를 통해 장래 유사한 행위를 방지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아마도 미국의 다른 호텔체인들은 이번 여성캐스터 몰카 사건을 통해 투숙객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보다 철저한 노력을 할 것이다.

이 제도와 관련한 최초의 판례는 1763년 영국의 '허클사건'이다. 이후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영미법 국가에서 이 제도를 활발히 도입했다. 우리에게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새롭게 각인된 사건은 1992년 미국의 일명 '맥도날드 커피' 사건이다. 당시 79세 한 할머니가 커피 뚜껑을 열다가 실수로 커피를 엎질러 하반신에 3도 화상을 입었고 2년간 치료를 받게 됐다.

이후 맥도날드에 2만달러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사건은 법정으로 갔는데 금전배상액은 실제 피해액의 260배가 넘는 270만달러로 결정됐다. 법원의 주된 논지는 최근 10년간 유사한 피해가 수백 건이 발생했음에도 맥도날드가 피해방지를 위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후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일회용 커피컵에 '매우 뜨거우니 주의하십시오'라는 문거가 새겨지게 됐다.

공정한 사회시스템은 엄격한 법 집행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 미국은 엄격한 법집행을 통해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대표적 국가다. 다수의 소비자들이 피해를 보거나 볼 수 있는 기업의 불법행위에 대해 많은 사회적 비용이 수반되는 징벌적 손해배상이라는 극약처방을 통해서라도 엄격히 법을 집행하고 이를 수용하는 법문화가 공정한 사회시스템을 만드는 기초가 되고 있다.

공정한 사회적 시스템이 결여된 상황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규제도 그 역할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실례로 우리나라의 사외이사 제도를 살펴보도록 하자. 주주총회 시즌을 맞이해 많은 기업들이 새로운 사외이사를 선임하고 있다. 하지만 올해도 사외이사 선임문제는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사외이사는 경영진과 최대주주로부터 독립돼 전문적인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경영진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다른 나라와 비교해 매우 특이한 사외이사 이력을 살펴볼 수 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올해 10대그룹의 신규, 재선임 사외이사 두 명 가운데 한 명 정도가 경제부처 등 권력기관 출신인 것으로 나타났다. 즉 사외이사의 본래 역할은 도외시되고 이른바 '전관예우'가 가능한 권력기관 출신인사들이 '방패막이' 사외이사로 선임되고 있는 것이다.

사외이사와 관련한 법률상 규정에 허점이 있는 것일까. 우리 상법과 자본시장법은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사외이사 자격요건에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고 있다. 상장규정과 지배구조 모범규준에서도 사외이사 독립성과 전문성을 담보할 수 있는 자세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세밀한 규정이 있음에도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사외이사들 때문에 '사외이사 무용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결국 사외이사 제도의 내재적 한계 때문인가.

무엇보다 근본적 문제는 '방패막이' 사외이사가 아직 통한다는 것이다. 권력기관 출신 사외이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유·무형적으로 이들의 입김이 전직기관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미다. 사외이사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고 이를 통해 바람직한 지배구조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회사법을 비롯한 지배구조 관련규정의 정비도 중요하지만 지배구조 시스템을 뒷받침하는 공정한 사회시스템이 엄격한 법집행을 통해 공고히 돼야 한다.

다시 말해 전관예우가 통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방패막이 사외이사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공정사회 시스템의 토양에서 건실한 기업 지배구조가 자리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Who is]

윤승영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연구위원은 한국외대 법학사, 미국 위스콘신주립대 법학석사, 미국 워싱턴대 법학박사 학위와 미국변호사(D.C.) 자격을 취득했다. 현재 한국기업지배구조원에서 기업지배구조와 금융법 등에 대한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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