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서로를 지겨워하며 살고 있다.
해외에서 장기체류하는 한국인들이 가장 경계하는 사람은 같은 한국인이다. 살이 살을 먹고 쇠가 쇠를 먹듯, 동족과 인연이 결코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음을 피부로 알기 때문이다. 잠시 머무르는 여행지에서도 동족과 조우하면 될 수 있는 한 외면하며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경계해야 할 두려움의 대상임을 잘 안다.
오래 전에는 낯선 어른이 공원에서 뛰어노는 어린아이에게 말을 걸거나 쓰다듬으며 먹을 것을 나눠주는 일들이 아무런 문제 되지 않았다. 지금 그러면 아이와 부모를 기겁하게 해 변명을 늘어놓아야 할 것이다. 혼잡한 버스나 지하철에서 앞에 선 이의 무거운 짐을 선선히 받아주거나 맡기는 일들도 사라졌다. 이제는 자신의 배려가 상대에게 당혹과 불편함이 됨을 서로가 알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공포가 되어버린 공동체에서의 삶 자체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연속이어서 우리는 서로를 지겨워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공동체는 ‘눈 먼 자들의 도시’다. 과거, 현재, 미래,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운데, 남을 짓밟고 서서 가져야만 한다는 욕망에 타오르는 눈빛만이 이글거리는 도시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눈이 있다. 몸에 있는 눈은 외부로 돌출된 장기의 하나일 뿐, 현상의 이면을 들여다보지는 못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과 진심 등은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타인에 대한 두려움 대신 관심과 애정을 지닌 이들이야말로 마음의 눈을 가진 눈 뜬 이들이다.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동포애(同胞愛)로써 살아가는 눈 뜬 이들이 있다. 자신의 명함에 점자를 병기해 놓은 사람들이다. 소수자와 함께하겠다는 생각을 명함에 옮겨 놓은 이들이다.
신기하게도 이들은 점자명함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점자명함을 갖는 것만으로 그간 눈에 보이지 않았던 사물의 진면목이 느껴지고 인식의 지평이 넓혀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점자명함을 갖는 행위가 시각장애인을 배려하고 소통하기 위한 본래의 목적 외에도 눈 뜬 장님들 간의 교감을 확산시켜 마음의 눈을 뜨게 하는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진실과 진심은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 드러나게 마련이고,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눈 뜬 장님들만이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할 뿐이다. 우리는 팔다리를 잃으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영혼을 잃는다면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눈 뜬 장님들이 그렇다. 내 영혼을 잃기 전에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 점자명함을 갖는 것이 그 출발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