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전범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자 대법원이 최종 선고를 미루기 위해 청와대와 외교부에 의견서 제출을 독촉까지 했다는 정황이 검찰에 포착됐다. 그동안 박근혜 행정부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던 강제징용 재판거래에 사법부가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점에서 파장이 예상된다.
22일 머니투데이 '더엘'(the L)의 취재 결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재판거래 및 법관·민간인 사찰 등 의혹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1·3부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지연시키기 위해 대법원이 외교부에 재판 관련 '의견서'를 내달라며 법원행정처 간부와 청와대 등을 통해 독촉했다는 단서를 포착했다.
앞서 검찰은 미쓰비시중공업, 신일철주금(전 신일본제철), 후지코시 등 일본 전범 기업에 대한 국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를 무력화하기 위해 2013년에 이어 2014년에도 사법부와 행정부 장관, 청와대 참모 등이 당시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의 공관에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다는 진술과 이를 뒷받침할 자료를 확보했다.
2014년 회동의 경우 당시 박병대 법원행정처장(대법관)과 황교안 법무부 장관, 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 윤병세 외교부 장관, 조윤선 정무수석 등이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한일관계 악화를 막기 위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 대한 최종 선고를 미루는 등의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검찰은 파악했다. 당시 이 소송은 대법원에서 피해자들의 승소 취지로 판기환송된 뒤 2심에서 피해자들이 대법 판결 취지대로 승소, 다시 대법원으로 올라가 마지막 확정판결만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당시 대법관과 장관들은 △일본 전범기업 측 대리인단이 대법원 재판부에 정부 의견을 제출받아줄 것을 촉구하고 △대법원 재판부가 그 요청을 따르는 형식으로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을 요청하고 △대법원은 이를 근거로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는 방안 등을 검토했다. 검찰은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외교부 문건을 확보했다.
실제로 대법원과 정부는 대책회의 내용대로 움직였다. 대법원은 2015년 1월 민사소송규칙 제134조의2를 신설해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가 대법원에 재판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후 대법원은 외교부에 규칙 개정 취지를 설명하는 문건을 보내기도 했다. 대법원은 외교부가 2016년 들어서도 의견서를 제출하지 않자 청와대와 법원행정처 간부를 통해 간접적으로 제출을 독촉한 것으로 검찰은 파악했다.
이후 외교부는 2016년 11월 대법원에 의견서를 제출했다. 개정된 민사소송법이 적용된 첫 사례였다. 대법원은 당시 이 재판을 전원합의체에 올려 대법원장과 다른 대법관들의 의견을 듣던 중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지면서 전원합의체 회부 논의를 즉각 중단했다. 대법원은 2016년 11월 이후 올해 7월까지 이 사건을 진행하지 않았다.
검찰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인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 협정'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박근혜정부 청와대가 재판 개입을 시도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대법원은 상고법원 도입을 관철하고 판사들의 해외공관 파견 확대 등 이권을 따내기 위해 청와대에 협조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 재판이 원고 승소로 확정돼선 안 된다는 판단 아래 김 전 실장에게 개입을 지시하거나 이에 대해 보고를 받은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