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 음식 먹고 제 아이가 장염에 걸렸어요. 장사 그만두고 싶어요? 빨리 약값이랑 죽값 제 계좌로 보내세요"
일명 '장염맨'이 나타난 건 2020년 5월. 40대 남성 A씨는 전국을 누비며 1년 반 동안 작은 디저트 카페, 음식점, 반찬가게 전화를 걸었다. A씨는 "그 집 음식을 먹은 뒤 장염이 났다"고 주장하며 가게 사장들에게 보상금을 요구했다. A씨가 음식점 사장들에게 요구한 보상금은 최소 10만 원에서 최대 100만 원. 돈을 부친 가게도 최소 수십 곳에 달했다.
서울, 경기, 인천, 부산 등 전국 곳곳 경찰서에는 '장염맨' 사건이 접수됐다. 전국적으로 피해액과 피해자가 계속해 늘어나자 지난해 11월 이계형 당시 서울 성북경찰서 수사과장(경정·37)이 나섰다. 이 경정은 경찰서내 1개 팀을 전담팀으로 지정해 추적 수사 활동을 벌였다.
이 경정은 수사팀원들과 전국적으로 접수된 사건들의 내용을 살펴본 뒤 A씨의 근거지를 모두 방문했다. A씨가 불법 도박이 이뤄지는 성인 PC방을 이용한 흔적을 발견하고 해당 영업장의 CC(폐쇄회로)TV를 모두 확인했다.
영상을 판독하고 목격자의 진술을 들은 뒤 A씨가 결벽증이 있어 손소독제를 수시로 뿌리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A씨는 태극 마크가 그려진 마스크를 착용하고 다니며 늘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통화하고 있다는 것도 파악했다.
이어 본인의 명의가 아닌 관계를 쌓아온 성인 PC방 업주의 명의의 통장을 빌려 식당 사장들에게 보상금을 받은 것을 확인했다. A씨는 성인 PC방 이용료를 제하고 돈을 받는 방식으로 현금을 편취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경위와 수사팀은 PC방 업주들에 이런 A씨의 특징을 알리며 수사 협조를 요청했다.
경찰의 3개월간 끈질긴 통신 추적과 계좌 추적 끝에 지난 1월 말 경북 구미의 노상에서 배회하는 A씨를 검거했다. A씨는 갈취한 돈을 대부분 도박으로 탕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수사 끝에 재판에 넘겨진 A씨는 1심에서 징역 1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경찰대를 졸업하고 2008년에 입직한 이 경정은 올해로 14년 차 베테랑 경찰이다. 그 중 이 경정의 수사 경력은 약 9년으로 경찰 생활의 반 이상을 수사과에 몸담았다.
이 경정은 "경찰 수사는 사실상 경찰이 하는 업무의 가장 중추"라며 "인간으로 치면 척추 같은 부분이다. 모든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분쟁과 혼란은 다 수사와 관련이 있고 수사로 풀어나가는 것들이 매우 많다. 하나하나 실마리를 풀어가는 게 묘미"라며 수사과의 매력을 설명했다.
이 경정은 2020년 20대 초반 청년 100여명이 숙소를 빌려 합숙 학습을 하면서까지 계획한 조직적인 보험 사기 사건을 해결하기도 했다. 보험 사기단은 큰 승합차를 빌린 뒤 동승자를 최대한 늘려 피해액을 높이고, 보험 지급 구조와 과실을 따진 뒤 13개 보험사로부터 77회에 걸쳐 약 10억원을 편취했다.
이 경정은 "이러한 큰 사건은 보통 이제 보험사에서 제보가 들어오는데 비슷한 사례가 쌓이기 마련이다"며 "비슷한 수법들이 반복되고 여러 사람이 얽혀 있는 걸 파악한 뒤 조직화한 사건임을 알아챘다. 여러 차례 반복된 사건과 얽혀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조사를 하면서 수사 외연을 늘려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해당 수사팀은 제보받은 인적 사항을 특정한 뒤 수도권 일대에서 교통법규 차량 위반은 차량을 물색했다. 이후 해당 사기단에 영장을 청구한 뒤 보험사기범 110명을 검거했다.
이 경정과 수사팀은 수사 과정에서 해당 사기단 대부분이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임을 고려해 라포르(신뢰관계)를 쌓는데 각별한 신경을 썼다. 수법과 행적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게끔 낱낱이 확인했지만, 공감대를 쌓으며 참작 사유와 반성을 요구하며 진술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경찰대 졸업(24기), 사법시험 합격(53회), 책임수사관 1회, 수사과 치안 성과 1위. 이 경정은 10여 년간의 경찰 생활하는 동안 수사와 관련된 많은 타이틀을 얻었다. 하지만 이 경정은 이러한 타이틀보다 "수사보고서 참 잘 썼다"는 말이 가장 좋다고 했다.
이 경정은 "글을 쓰는 걸 좋아하긴 하는데 수사 관련 보고서를 쓸 때도 참신하게 쓰려고 노력한다"며 "수사 기획서나 수사 검토 보고서도 어떻게 하면 창의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하는 편. 기존 수사 논거보다 새로운 논거를 제시하기도 하면 굉장히 반응이 좋아서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형사 사법제도 자체는 사실상 거의 서면주의다 보니 글을 논리적으로 빠짐없이 쓰는 능력이 중요하다"며 "그래서 항상 연구하고 많이 연습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실제로 이 경정의 사무실 한쪽 벽에 위치한 책꽂이에는 다양한 분야의 서적이 빼곡히 꽂혀있었다. 이 경정은 시간이 나는 대로 장르 불문 다양한 책을 읽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수사부서를 희망하지만 지원을 주저하는 후배들에게 이 경정은 "수사과 업무가 법률적인 공부해야 할 것도 많고 어떤 절차상에 지켜야 하므로 되게 조심스러울 것도 많다"며 "업무량 적인 측면에서 정말 다른 데와 비교할 수 없이 많은 건 맞지만 그래서 그 어느 것보다 굉장히 보람이 있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아무나 할 수는 없다는 얘기처럼 충분히 보람을 찾을 수 있고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게 수사 업무"라며 수사과 지원을 적극적으로 격려했다.
앞으로의 경찰로서의 목표를 묻자 "경찰 수사가 사회적으로 신뢰받고 존경받는 그런 수사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싶다"며 "인재 육성이나 수사에 들어오는 인재들이 역량을 펼치면서 쭉 일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