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쏘고 가라"...계엄의 밤, 백발시민도 대학생도 국회로 달려갔다

김미루, 김서현, 최문혁 기자
2025.12.03 07:20

[MT리포트] 비상계엄 1년, 12.3이 남긴 것(中-1)

[편집자주] 12.3 비상계엄 이후 1년이 지났다. 국민의 힘으로 계엄은 저지됐다. 민주주의는 복원됐고, 경제는 회복 중이다. 역사적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그날의 기억을 되살리는 한편 12.3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들도 다시 살펴본다.

"안 가는 게 더 무서웠다"…계엄의 밤, 장례식장에서 국회로 달려갔다

최윤이씨(28)가 2024년 12·3 비상계엄 당시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 국회로 달려온 시민들과 경찰 차량이 얽혀 있는 모습. /사진제공=최윤이씨

지난해 12월3일 밤 10시30분. 직장인 최윤이씨(28)는 장례식장에서 텔레그램 메시지를 확인했다.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40여년간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 선배 세대의 노력으로 쌓여온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흔들린 현실에 눈앞이 캄캄했다.

영등포구 집 근처에 군인이 깔렸을 것이란 생각이 스쳤다.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동시에 국회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에게 "보조배터리와 핫팩을 준비하자"고 말하고 장례식장에서 일어났다. 최씨는 직장을 다니면서 지인과 함께 서울여성회에서 딥페이크 성범죄 규탄 집회 등 여성혐오에 맞선 여러 활동을 펼쳤다.

◆ 가까스로 잡힌 택시…"위험하다"면서도 출발한 기사

국회로 향하는 택시가 가까스로 잡혔다. 당시 장례식장 앞에서 만난 택시 기사는 손을 벌벌 떨었다고 한다. 기사는 "계엄인 걸 알고 있냐. 위험하다"고 했다. 최씨는 "국회에 안 가는 게 더 무섭다"고 답했다. 기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가장 가까운 곳에 데려다주겠다"며 차를 몰기 시작했다. 기사는 "어린 시절 전남 광주에서 계엄군을 마주한 경험이 있다"며 "무섭지만 몸이 움직였다"고 했다.

국회에 가까워지자 장갑차와 군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철 9호선 여의도역부터 국회의사당역까지 군 차량이 막아 30분을 걸어야 했다. 최씨는 "거리에 사람이 한 명도 없이 적막해서 무섭다가도 저 멀리 국회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니 안전하겠다는 확신과 안심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국회로 이동하며 소셜미디어로 실시간 상황을 파악했다. 더 빨리 국회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씨는 "피로 바꿔온 역사를 투쟁으로 지켜야 했다"며 "돌이켜보면 '죽어도 가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국회 정문에서 경찰관들과 대치하던 시민들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최윤이씨가 계엄 당일 현장에 모인 사람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 /사진제공=최윤이씨

최씨는 "당시 단체 활동가보다 일반 시민이 훨씬 많아서 무척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도 투쟁을 외치고, 서로 목마를 타고 외치기도 하고 진심인 모습이었다"고 했다. 최씨는 계엄 해제가 이뤄진 다음 날 새벽 4시30분에 집으로 돌아갔다.

◆ 동력이 된 그밤의 경험…"빛을 본 순간을 떠올릴 것"

계엄 직후 국회로 달려간 경험은 삶의 새로운 '동력'이 됐다. 최씨는 "국회 앞에서 승리의 기적을 만든 순간은 지난 1년간 힘들고 지칠 때마다 꺼내볼 수 있는 장면이 됐다"며 "변화를 믿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계엄 당일을 떠올리며 책 '김남주 평전(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영혼을 던져보았는가)'를 읽고 있다. '저항 시인' 김남주는 1979년 유신 말기 '남민전 사건'으로 10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다. 그가 남긴 시 510편 중 360편이 옥중에서 탄생했다. 최씨는 책을 읽으며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의 중요성을 되새겼다.

최씨는 집 근처에서 잦아진 혐중 시위로 갈등이 쉽게 극단으로 치닫는 분위기를 체감한다. 그는 "같이 광장을 지킨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연대의 감정을 잃어가는 게 마음이 아파서 사람들과 더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며 "중요한 가치를 지키려 하는 사람이 많으면 변화를 만드는 모습을 우리는 봤다. 그 빛을 본 순간을 다시 떠올릴 것"이라고 했다.

최윤이씨는 계엄 이후 '김남주 평전(그대는 타오르는 불길에 영혼을 던져보았는가)'를 읽으며 맞서 싸우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되새겼다. /사진제공=최윤이씨.

계엄날 백발 시민은 군인에게 말했다…"날 쏘고 넘어가라"

문혁씨(73)가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 사진을 보고 있다. 휴대전화 속 사진은 은박지를 덮은 채 눈을 맞고 있는 집회 참여 청년들의 모습. /사진=최문혁 기자.

지난해 12월3일 밤 11시40분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앞. 철공소 사업을 하다가 은퇴한 백발의 문혁씨(73)가 놀란 건 무장한 군인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국회로 달려온 수많은 청년들과 함께였다. 문씨는 "(청년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동시에 느꼈다"고 말했다.

문씨는 계엄 당일 잠을 자려고 누웠다가 지인의 전화를 받고 계엄 선포 사실을 알았다. 그는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리며 "몸부터 숨겨라"고 당부했다. 정작 자신은 차를 몰고 국회로 향했다. 평생 서울에서 살며 여러 격동의 순간을 목격한 문씨는 "계엄의 무서움을 알기에 잡히면 큰일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면서도 "시민들이 국회로 모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고 했다.

국회 정문 근처에 도착하자 군인들이 버스에서 우르르 내렸다. 그들은 총을 들고 열 맞춰 시민들과 대치했다. 문씨는 "지휘관 지시에 앞줄 군인 8명이 담장을 넘어 국회로 들어가길래 지인과 함께 군인들을 끌어내렸다"며 "군홧발에 얼굴을 찍힐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젊은 군인들은 적극적인 의사를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자 시민들이 스크럼을 짜고 국회 담장을 넘으려는 군인들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문씨는 자신에게 다가온 군인에게 모자를 벗고 백발을 보여줬다.

"살 만큼 살았으니 나를 총으로 쏘고 넘어가라."

지휘관은 병력을 철수시켰다. 국회 상공에선 헬기 소리가 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회 본회의에서 계엄 해제 안건이 가결됐다.

◆ 강렬한 청년들의 모습…"'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는 말 체감"

문씨가 고사성어 '공휴일궤'를 한자로 써 내려가고 있다. /사진=최문혁 기자.

문씨는 계엄 당일 청년들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그는 "원래 집회 현장에서 젊은 친구들은 귀하다"며 "계엄령이 선포된 날 국회 앞은 달랐다. 청년들이 유독 많이 보였다"고 회상했다. 이어 "혹시 모른다는 불안감에 계엄 해제 후에도 해가 뜰 때까지 국회 앞을 지켰다"며 "많은 청년들이 국회의사당역 안에 종이상자를 깔고 자고 있었다"고 말했다.

탄핵 촉구 집회에서 만난 청년들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문씨는 "추운 겨울 은박지를 덮고 앉아 눈을 맞는 청년들을 보며 미안하고 고마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문씨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역사적 쾌거가 청년들을 국회로 이끈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소년이 온다'가 세계적인 관심을 받으며 계엄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 계엄의 무서움을 전해줬다"며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는 말을 체감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소년이 온다'는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한 작가는 계엄 선포 2개월 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내란 혐의 재판을 지켜보며 문씨는 '공휴일궤'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렸다. 공휴일궤는 한 삽의 흙이 모자라 공들여 쌓은 산이 한꺼번에 무너진다는 뜻이다. 그는 기자 앞에서 공휴일궤를 직접 써내려가면서 "마지막까지 책임을 묻고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한강 소설 읽다 국회 간 대학생

지난해 12월3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다음날 새벽 2시쯤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 앞. 계엄 해제 발표를 기다리는 시민들과 인파를 통제하는 경찰이 뒤섞여 국회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모습. /사진제공=채윤씨.

지난해 12월3일 밤, 문예창작과 1학년생 채윤씨(20)는 서울 서대문구 집에서 비평 과제를 하고 있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소설을 통해 '문학의 시대적 책임'을 서술하라는 과제였다. 소설의 배경인 1980년의 광주를 공부해 갔다. 머리를 싸매다가 자정이 돼서야 확인한 휴대전화는 뜨거웠다.

"계엄이 선포됐다."

단체 대화방에 수많은 메시지가 쏟아져 있었다.

채씨는 "처음엔 인공지능이 만든 가짜라고 생각했다. 계엄일 리가 없지 않냐"며 "뒤이어 유튜브를 켰더니 난리가 난 국회 주변 영상이 보였다. 대통령이 진짜로 계엄을 선포한 건가 싶어 얼떨떨함이 컸다"고 말했다.

그는 곧장 나갈 채비를 했다. 채씨는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코트를 걸치고 태블릿PC와 보조배터리를 가방에 넣었다. 심야버스를 기다릴 시간도 없었다. 눈에 보이는 택시를 잡아탔다. "여의도 간다"고 하자 60대쯤 돼 보이는 택시 기사는 "젊을 때 나도 학생 운동했다. 통제 때문에 다는 못 들어갈 테니 가능한 데까지 가보겠다"고 말했다.

4일 오전 1시30분쯤 국회 인근 도로에 도착하자 많은 시민이 모여 있었다. 국회가 계엄 해제 요구 안건을 가결했지만 대통령이 해제 발표를 하지 않고 있었다. 군인은 철수했지만 경찰이 시민들을 통제했다.

채씨는 "근현대사를 공부하면서나 보던 '계엄철폐', '독재타도' 구호가 다시 나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며 "대통령이 계엄 취소를 안 하니 집에도 못 들어가고 계속 국회 앞을 지켰다"고 말했다.

◆ 문학과 함께 배운 역사…"다신 겪으면 안 되는 일"

서울 헌법재판소 인근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 선고를 앞두고 플루트를 부는 채윤씨(20) 모습이 지난 4월4일 오전 본지 카메라에 잡혔다. 채씨는 계엄 사태 이후 탄핵 찬성 집회에 참여하며 플루트를 연주했다. /사진=머니투데이.

그가 국회로 향한 배경엔 가족들도 있었다. 부모는 젊을 때 노동운동을 했고, 할머니는 제주 출신이다. 채씨는 "우리 집은 왜 이승만, 전두환을 싫어하는지 궁금해서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며 "한국에선 특히 예술과 역사가 발맞춰 간다는 생각이 있어서 세계대전과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했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전쟁도 아니고 간첩 사건도 아닌데 계엄까지 가는 사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지난 1년간 그의 뇌리에는 비평 과제를 쓰며 읽었던 한강의 문장이 남았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계엄 이후 이 문장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했다'고 변용돼 정치적 수사로 쓰였다. 그는 "그들의 희생을 단순한 교훈으로만 소비해서는 안 되지 않냐"며 "계엄을 직접 겪어보고 나니까 누구도 다시는 그런 일을 겪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말도 안 되는 계엄 자체가 없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특검 수사와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실망도 커졌다. 그는 "내란 재판이 제대로 진행되는 것 같지 않아 답답하다"며 "윤석열 정부가 끝났다고 다 끝난 게 아니지 않냐"고 했다. 이재명 정부의 헌법존중TF(태스크포스)에 대해선 "말단 공무원까지 색출하겠다는 건 가지치기밖에 안 된다"며 "정당 정치인부터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채씨는 거리 곳곳에서 열리는 혐오 시위를 보며 역사교육이 실패한 것 같단 생각을 한다. 그는 "저는 취직이 잘 안 된다"며 "그 불안 때문에 약자를 혐오해선 안 된다. 우리 사회가 불평등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혐오가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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