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현장에서 발생한 산업재해 가해자가 다른 회사 사람이라도 실질적인 지휘·감독을 받았다면 근로복지공단이 구상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산재 위험을 함께 공유했다면 구상권 행사가 가능한 제3자가 아니라는 취지다.
대법원 1부(주심 마용주 대법관)는 근로복지공단이 B씨에게 구상금을 청구한 사건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근로복지공단의 청구를 기각했다고 1일 밝혔다.
2018년 부산 해운대구 한 복합시설 철거공사 현장에서 A사 소유 굴삭기를 운전하던 B씨가 작업 중 튄 철근에 의해 같은 회사 소속 근로자가 안면부를 다쳤다. 근로복지공단은 피해 근로자에게 휴업급여와 요양급여, 장해급여 등 약 7800만원을 지급한 뒤 B씨를 상대로 구상금 소송을 제기했다.
산재보험법에 따르면 공단은 제3자의 행위에 따른 재해로 보험급여를 지급한 경우에는 그 급여액의 한도 안에서 급여를 받은 사람의 제3자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대위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보험가입자인 둘 이상의 사업주가 같은 장소에서 하나의 사업을 분할해 각각 행하다가 그 중 사업주를 달리하는 근로자의 행위로 재해가 발생하는 경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1·2심은 B씨가 A사와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가 아니라는 점 등을 들어 산재보험 관계가 없는 '제3자'에 해당한다고 보고 공단의 청구를 받아들였다. 공단이 보험급여액 한도 내에서 피해 근로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대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B씨가 굴삭기 운전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A사의 지휘·명령을 받았고 피해를 입은 근로자 역시 같은 사업주 소속으로 동일한 공사 현장에서 작업을 수행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사업장에 내재된 위험을 공동으로 부담하는 관계에 있었고 그 위험이 현실화돼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산재보험법에 따른 대위권의 행사 범위는 보험료 부담관계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근로자 또는 노무제공자들이 동일한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업무상 재해에 관한 공동의 위험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고 했다.
이어 "가해자가 재해 근로자의 사업주와 고용계약을 체결한 근로자가 아니더라도, 동일한 사업주의 지휘·명령 아래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재해가 발생했다면 양자는 사업 또는 사업장에 내재하는 위험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며 "이 경우 가해자는 산재보험법상 제3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근로복지공단이 B씨에게 피해 근로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을 대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B씨를 제3자로 본 원심 판단이 잘못이 있다고 보고, 원심 판결 중 피고 패소 부분을 취소하고 근로복지공단의 청구를 기각했다. 사건은 추가 심리 없이 대법원이 직접 재판해 마무리됐다.
이번 판결은 건설현장 등에서 외주 인력이나 장비 운전자가 관여된 산업재해의 경우 구상권 행사 범위를 제한하는 기준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동일 사업장 내에서 실질적으로 지휘·감독을 받으며 업무를 수행했다면 형식적인 근로자 여부와 관계없이 손해배상청구권을 대위 행사할 수 있는 제3자로 보기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